2024년 3월 7일 목요일

민위방본民爲邦本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

민위방본民爲邦本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

민위방본(民爲邦本)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

백성 민(氏/1) 하 위(爪/8) 나라 방(阝/4) 근본 본(木/1)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다. 백성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는 것은 민심을 얻지 않고서는 나라까지 모든 것이 바로 설 수 없다는 말이다. 나라님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민심은 물과 같다’는 말도 백성의 뜻을 거스르면 물이 배를 뒤엎듯이 응징하기 때문이다. 孟子(맹자)가 민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특히 강조한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백성을 잃은 것은 그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桀紂之失天下也 失其民也 失其民者 失其心也/ 걸주지실천하야 실기민야 실기민자 실기심야).’ 그러면서 백성을 얻으려면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離婁上(이루상) 편에 있다.

앞서 소개한 民心無常(민심무상)은 백성들의 마음이 일정하지 않아 다스리는 데에 따라 착하게도 하고 무섭게도 변한다는 말이다. ‘오직 혜택을 주는 사람에게 따르기 마련(民心無常 惟惠之懷/ 민심무상 유혜지회)’이라고 書經(서경)에 실려 있다. 春秋(춘추) 이전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 尙書(상서)라고도 하는 책이다. 백성(民爲)이 나라의 근본(邦本)이라는 이 성어도 ‘서경’ 夏書(하서)편에 나온다. 하나라의 두 번째 임금 啓(계)는 시조 禹(우)임금의 아들이고, 처음 세습으로 아들 太康(태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태강은 사냥에만 골몰하고 정치는 돌보지 않아 后羿(후예, 羿는 사람이름 예)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났다.

태강의 다섯 동생들은 그를 기다리며 노래를 불렀다. ‘五子之歌(오자지가)’이다. 첫 번째 동생이 부른 내용을 보자. 할아버지 우임금이 훈계했다는 내용이다. ‘백성은 가까이 할 수는 있으나 얕보아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 민가근 불가하 민유방본 본고방녕).’ 끝부분에도 좋은 말이 나온다.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두려워하고, 썩은 새끼로 여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모는 듯이 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어찌 존경하지 않겠는가(予臨兆民 懍乎若朽索之馭六馬 爲人上者 柰何不敬/ 여림조민 능호약후삭지어륙마 위인상자 내하불경).’ 懍은 위태할 름.

이런 백성이 사직이나 군주보다 귀하다고 한 사람도 맹자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벼운 존재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란 말이 盡心(진심) 하편에 나온다. 군주가 없는 요즘은 선거 때 민심을 들먹인다. 국민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아는 것이 물론 중요한데 문제는 투표가 끝나면 곧 잊어버린다는 데 있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あじわう味わ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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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じわう味わう

=> 맛보다, 체험하다, 감상하다;음미하다

두견척촉 杜鵑躑躅- 진달래와 철쭉을 함께 이르는 말

두견척촉 杜鵑躑躅- 진달래와 철쭉을 함께 이르는 말

두견척촉 (杜鵑躑躅)- 진달래와 철쭉을 함께 이르는 말

막을 두(木/3) 두견새 견(鳥/7) 머뭇거릴 척(足/15) 머뭇거릴 촉(足/13)

어려운 글자로 된 이 성어는 진달래와 철쭉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봄을 대표하여 곳곳에 축제도 벌이는 이들 꽃은 자주 일컫는 말로는 서로가 딴판이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하여 참꽃이라 하지만, 철쭉은 개꽃이라 부른다.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고 염소나 양도 피한다고 한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란 구절의 시 ‘진달래꽃’은 金素月(김소월)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李元壽(이원수)의 ‘고향의 봄’에도 등장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趙演鉉(조연현)은 이렇게 노래했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진달래꽃을 杜鵑花(두견화)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애달픈 이야기가 따른다. 秦(진)나라에 멸망한 고대 蜀(촉)나라의 望帝(망제)의 혼이 두견새가 되었다고 前漢(전한)말기의 揚雄(양웅)이 지은 ‘蜀王本紀(촉왕본기)’와 東晋(동진)의 常璩(상거, 璩는 옥고리 거)라는 사람이 지은 ‘華陽國志(화양국지)’에 나온다고 한다. 망제는 나라를 빼앗긴 뒤 밤마다 ‘不如歸(불여귀, 돌아가고 싶다)’라고 피가 나도록 울다 죽어 두견새가 되었다. 접동새, 子規(자규)로 불리는 두견새는 그래서 歸蜀道(귀촉도), 蜀魄(촉백), 망제의 이름을 따 杜宇(두우), 杜魄(두백)이라 하기도 한다. 망제의 피가 떨어진 곳에 피어난 꽃이 진달래꽃이다. 진달래꽃을 넣어 빚은 술이 杜鵑酒(두견주)이고 진달래 꽃잎을 따 찹쌀가루를 섞어 지진 花煎(화전)은 예전 행락객의 최고의 운치였다.

5월에 잎과 함께 가지 끝에 연한 분홍색의 꽃이 피는 철쭉꽃은 먹지는 못해도 꽃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 앞에서 머뭇머뭇하게 한다고 해서 躑躅花(척촉화)가 됐다고 한다. 실제 뜻으로 결단을 못하고 우물쭈물한다는 뜻으로 많이 고전에서 사용됐다. 조선 명종 때의 문신 裵龍吉(배용길, 1556~1609)의 철쭉을 읊은 시가 있다. ‘철쭉이 못 가에서 자태를 뽐내나, 외로운 꽃떨기 힘없이 모두 기울었네(躑躅臨池欲自誇 孤䕺無力摠低斜/ 척촉림지욕자과 고총무력총저사), 봄날이 지나가니 꽃도 따라 시드는데, 이제야 술잔 잡고 꽃구경을 하려네(春光已老花隨老 始酌叵羅欲賞花/ 춘광이로화수로 시작파라욕상화).’ 䕺은 떨기 총, 叵는 어려울 파. ‘琴易堂集(금역당집)‘에 실려 있다.

봄에 흔한 꽃에 이처럼 여러 의미가 있는 것은 의외다. 아름다움에 취해, 흥에 겨워 꽃을 지나치기 전에 간단한 뜻을 새기면 더 의의가 있겠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호사토비狐死兎悲 - 여우의 죽음에 토끼가 슬피 울다.

호사토비狐死兎悲 - 여우의 죽음에 토끼가 슬피 울다.

호사토비(狐死兎悲) - 여우의 죽음에 토끼가 슬피 울다.

여우 호(犭/5) 죽을 사(歹/2) 토끼 토(儿/5) 슬플 비(心/8)

교활한 이미지로 먼저 다가오는 여우는 백발이 될지 모르나 결코 선량해지지 않는다고 낙인이 찍혔다. 九尾狐(구미호)는 간사하고 요망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 토끼는 정답고 친한 동물로 여겨진다. 게으름을 부려 거북에게 경주를 지지만, 자라를 속여 목숨을 건지는(鼈主簿傳/ 별주부전, 鼈은 자라 별) 지혜가 있어 사랑스러운 분신의 대명사다. 그런데 이 둘은 사이가 좋을까. 달리기에서 월등하게 앞서는 토끼와 쫓아봐야 헛일인 것을 아는 여우는 그저 그런 사이다. 여우가 죽었을 때(狐死) 토끼가 슬피 운다(兎悲)는 이 성어는 같은 처지의 동류끼리 불행을 위로한다는 뜻도 있고,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슬픈 척 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중국 元(원)나라 때 완성된 ‘宋史(송사)’의 李全(이전)전에서 이 말이 유래했다. 송나라 말기, 1127년 女眞(여진)이 세운 金(금)나라가 쳐들어와 왕을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에 강남으로 쫓겨 가 南宋(남송)이 건립되었다. 졸지에 나라를 빼앗긴 강북 지역의 한인들은 곳곳에 자위를 위한 집단을 이루었고, 옛 땅을 찾기 위한 의병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楊妙眞(양묘진)이란 여걸이 오라버니 楊安兒(양안아)가 의병을 이끌다 전투 중 죽음을 당해 무리를 이끌게 됐고 이전이란 사람도 합류했다.

이전과 양묘진은 부부가 되어 남송과 금 사이에서 교묘히 줄타기를 했다. 楚州(초주)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남송에선 夏全(하전)이 이끄는 군대가 쳐들어왔다. 하전이 남송에 귀순한 의병 출신인 것을 알고 양묘진이 사람을 보내 말을 전했다. ‘여우가 죽으면 토끼가 슬퍼서 우는 법인데 이 쪽이 죽으면 그쪽도 어찌 홀로 살 수 있겠습니까(狐死兎泣 李氏滅 夏氏寧獨存/ 호사토읍 이씨멸 하씨녕독존)?’ 이 쪽은 물론 이전, 상대는 하전이다. 이 말을 들은 하전은 옳다고 여겨 공격을 멈췄으나 배반을 당해 나중 금나라에 투항했다. 여우 죽음을 슬퍼해 주려다 속아 넘어간 것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만파식적萬波息笛 - 모든 걱정거리를 해결해 주는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 - 모든 걱정거리를 해결해 주는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 - 모든 걱정거리를 해결해 주는 피리

일만 만(艹/9) 물결 파(氵/5) 쉴 식(心/6) 피리 적(竹/5)

힘든 세상엔 어려움이 가득하다. 世波(세파)라 한다. 수많은 물결 萬波(만파)는 모든 어려움을 말한다. 이 모든 고난을 그만두게 하는 피리(息笛)라는 이 말은 참으로 신통력을 가진 귀한 피리이겠다. 그런 만큼 이것을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또 폭우가 올 때는 그치게 하며 바람과 파도도 가라앉히는 효험이 있었다. 바로 統一新羅(통일신라) 때의 전설상의 피리 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해결하는 기원을 담았다.

신라 때의 왕은 시조 朴赫居世(박혁거세)와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29대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그 대업을 완수한 30대 文武王(문무왕)은 누구나 기억한다. 하지만 문무왕의 아들로 뒤를 이은 31대 神文王(신문왕, 재위 681∼692)은 상대적으로 멀게 느껴진다. 그렇더라도 통일 이후 넓어진 영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행정 체제를 정비하고, 고구려와 백제 등의 유민들을 각지로 이주시키며 군사조직도 정비한 치적은 평가받는다.

온갖 고난을 가라앉히는 피리는 신문왕과 관계가 깊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을 간추려 보자. 신문왕은 각처에 사찰을 짓는 등 불교 확장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아버지 문무왕을 기리는 感恩寺(감은사)를 동해변에 지었는데 바다 가운데서 작은 산이 생겨 그 위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죽어서 海龍(해룡)이 된 문무왕과 天神(천신)이 된 金庾信(김유신)이 보낸 대나무였다. 신문왕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天尊庫(천존고)에 보관했다. ‘피리를 불면 병란도 멈추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으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吹此笛 則兵退病愈 早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취차적 즉병퇴병유 조우우청 풍정파평 호만파식적 칭위국보).’

전설상의 피리라고 해도 온갖 고난이 넘치는 현실 세계에 하나쯤 있었으면 모두들 좋아하겠다. 현실이 어려우니 말이다. 만파를 잠재울 피리소리는 언제 들릴 것인지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운근성풍運斤成風 - 도끼를 움직여 바람소리를 내다, 최고 경지의 기술자

운근성풍運斤成風 - 도끼를 움직여 바람소리를 내다, 최고 경지의 기술자

운근성풍(運斤成風) - 도끼를 움직여 바람소리를 내다, 최고 경지의 기술자

옮길 운(辶/9) 근 근(斤/0) 이룰 성(戈/3) 바람 풍(風/0)

기술이나 능력이 경지에 오른 사람은 도구나 조건을 탓하지 않는다. 기술의 최고 달인이라 할 庖丁(포정, 庖는 부엌 포)은 소를 잡아 뼈와 살을 해체하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우면서도 19년 동안 칼을 갈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된 데는 마음의 눈으로 소의 살과 뼈, 근육 사이의 틈새를 보고 그 사이로 칼을 지나가게 하는데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한 번도 실수로 살이나 뼈를 다치게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우주의 본질을 아기자기하게 우화를 통해 비유한 莊子(장자)의 庖丁解牛(포정해우)에 나오는 이야기다.

포정과 마찬가지로 과장이 섞인 또 하나의 재주꾼이 역시 ‘장자’의 雜篇(잡편) 徐無鬼(서무귀) 편에 등장하는 匠石(장석)이란 사람이다. 그는 도끼를 움직여(運斤) 바람소리 나도록 휘둘러도(成風) 상대방 코끝에 바른 백토만 떨어뜨릴 정도의 경지를 지녔다.

장자가 생전 논쟁을 즐겼던 魏(위)나라의 사상가 惠子(혜자)의 무덤가를 지나면서 제자들에게 말한 데서 나왔다. 내용을 인용해 보자. ‘영 지방에 어떤 흙 장인이 자기 코끝에 파리 날개만큼 얇게 백토를 발라놓고 장석에게 그것을 깎아내게 했다. 장석이 도끼를 휘두르자 바람이 휙휙 났지만 장인은 그저 듣기만 할뿐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郢人堊漫其鼻端 若蠅翼 使匠石斲之 匠石運斤成風 聽而斲之/ 영인악만기비단 약승익 사장석착지 장석운근성풍 청이착지).’ 郢은 楚(초)나라서울 영, 堊은 흰흙 악, 斲은 깎을 착. 흙이 모두 깎여 나갔는데도 코는 다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장석은 뒷날 宋(송)나라 元君(원군)에 초청되어 시범을 요청받았으나 상대가 오래 전에 죽었다며 할 수 없다 했다. 장자는 재상도 지낸 혜자와 각별한 사이면서도 서로 비판하면서 지냈는데 죽은 뒤로는 이제 팔씨름하고 지낼 친구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神工鬼斧(신공귀부), 郢匠運斧(영장운부), 匠石運斤(장석운근)이라 해도 뜻은 같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매육매장買肉埋墻 - 사 온 고기를 담 밑에 묻다, 남을 더 생각하다.

매육매장買肉埋墻 - 사 온 고기를 담 밑에 묻다, 남을 더 생각하다.

매육매장(買肉埋墻) - 사 온 고기를 담 밑에 묻다, 남을 더 생각하다.

살 매(見/5) 고기 육(肉/0) 묻을 매(土/7) 담 장(土/13)

푸줏간에서 사 온 고기(買肉)를 담장 밑에 묻는다(埋墻)면 모두 어리석은 행동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모두 감사할 일이다. ‘검은 고기 맛 좋다 한다’는 속담이 있다. 고기의 겉모양만 보고 맛이 있는지 독이 들었는지 내용을 속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 말대로 사 온 고기를 잘 살펴보고 해로운 것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선 사 왔던 것뿐만 아니라 가게의 고기를 몽땅 사서 담장에 묻었다면 결코 어리석다고 못한다. 더구나 집이 아주 가난하여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理埋毒肉(이매독육)이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 宣祖(선조) 때에 정승을 지낸 洪瑞鳳(홍서봉, 1572~1645)의 모친이다. 호가 鶴谷(학곡)인 홍서봉은 仁祖反正(인조반정)에 참가한 후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고,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崔鳴吉(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한 사람이다. 홍서봉이 어릴 때 집이 매우 가난하여 ‘거친 밥과 나물국도 자주 거를 때가 많았다(疏食菜羹 每多空缺/ 소사채갱 매다공결). 먹을 食(식)은 이 때는 ’밥 사’의 뜻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루는 여종을 보내 고기를 사오게 했다. 고기의 빛깔을 살펴보니 독이 들어있는 것 같아 정육점에 얼마나 더 있더냐고 물었다. 몇 덩이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머리 장식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

그리고선 ‘여종을 시켜 고기를 모두 사오게 하고선 담장 밑에 묻었다(使婢盡買其肉 而埋于墻下/ 사비진매기육 이매우장하)’. 홍서봉의 이런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그곳서 고기를 사서 먹은 뒤 병이 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어머니의 이런 마음씨가 천지신명과 통하여 자손들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라고 홍서봉이 말했다. 高麗(고려) 이후의 저명인사를 여러 책에서 골라 그들의 훌륭한 말과 선행을 엮은 ‘海東續小學(해동속소학)’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朴在馨(박재형)의 저작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불량식품을 판 정육점은 당장 고발당하고 상응한 벌을 받을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악덕 상인들이 근절된다. 홍서봉의 어머니는 모든 것이 어려울 때 조그만 고깃점도 어려울 테고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했을지도 모르는 그 주인을 망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 틀림없다. 자신에게는 손톱 끝만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 하고, 없는 일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あしあと足跡

あしあと足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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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자취, 발자국, 행방, 업적

◇ 도동서원과 한훤당 고택카페

◇ 도동서원과 한훤당 고택카페

◇ 도동서원과 한훤당 고택카페

예전에는 누가 취미를 물으면 ‘절 구경 하기’라 대답했는데 요즘에는 서원 구경이 더 잦다. 지난해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관심사로 떠오른 이유도 없지 않다. 낙동강 일대는 특히 흥미롭다. 안동에는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과 서애 류성룡의 병산서원이, 남쪽 달성에는 한훤당 김굉필의 도동서원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원 구경은 허망할 때가 적지 않았다. 지금 서원이란 선현에 대한 제사를 제외한 다른 기능은 사실상 멈춰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건축물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서원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할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원은 아름답지만 재미는 적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도동서원 일대를 둘러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됐다.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서남쪽으로 돌아드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에 동북향으로 앉혀 있다. 한훤당 무덤이 있는 뒷산은 대니산(戴尼山)이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이니 ‘공자를 받든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한훤당은 인간의 기본 도리를 담은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린 인물이다. 주희가 편찬을 명한 것으로 알려진 소학은 양반집 어린아이가 8세가 되면 손에 잡는다는 기초 경전이지만, 조선 사림에게는 남을 다스리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먼저 다스리는 이치를 담은 최고의 경전이었다는 것이다. 조금의 과장은 없지 않겠지만, 그래서 한훤당은 나이 설흔이 돼서야 다른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스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소학을 세상을 통치하는 원리를 담은 대학(大學)보다 유용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이런 정도의 배경 지식만 갖추어도 도동서원의 모습은 달라 보였다. 낙동강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유형 유산으로 서원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소학 정신의 발신지’라는 무형의 정신 유산 또한 잊혀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이런 가르침이 서원에서 부족하게 느껴졌던 ‘오늘날에도 유효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 서원에서 그동안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것은 상식도 없이 찾아가곤 했던 ‘내 탓’이었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

도동서원을 찾는 사람 가운데는 젊은층이 많았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한훤당 고택카페가 벌써부터 ‘핫플레이스’로 떠올랐고, 카페를 목적지로 찾은 사람들의 발길이 자연스럽게 도동서원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대니산 동쪽 끝에 있는 고택은 서흥 김씨의 종가다. 김굉필의 후손이 1779년 지었다고 하니 한훤당(1454~1504)의 손때가 묻은 집은 아니다.

특유의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훤당 고택카페는 커피 손님이 많았지만, 미숫가루호두스무디, 가래떡추러스, 흑임자빙수처럼 전통에 바탕을 둔 먹거리도 인기를 끌고 있었다. 카페의 이름은 한글로 ‘소가’라 써 놓았는데, 손님들은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사랑채인 광재헌에 걸린 편액을 보고 곧 소학세가(小學世家)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학의 가르침을 대대손손 이어 가는 집안이라는 뜻이겠다.

한훤당 고택처럼 대표적인 도학자 집안의 유서 깊은 종가를 카페로 만들겠다는 종손의 결심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카페를 찾는 손님의 상당 부분은 필자처럼 서원 구경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들이라 감히 짐작해 본다. 카페는 이제 여름이면 고택음악회가 열리는 지역의 문화적 명소로 떠올랐다. 이렇게 카페는 한훤당의 가르침을 알리고 도동서원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하는 일종의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이런 게 문화재 활용의 진정한 모범 사례가 아닐까 싶다. 한훤당 후손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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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을 쳐들다, 거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