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2일 일요일

불비불명ㅣ不蜚不鳴

불비불명ㅣ不蜚不鳴

불비불명ㅣ不蜚不鳴

○ 큰 일을 하기 위해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뜻

○ 不(아닐 불) 蜚(날 비) 不(아닐 불) 鳴(울 명)

제위왕(薺威王) 때의 일이다. 왕은 수수께끼와, 음탕하게 놀면서 밤새워 술 마시기를 즐겨 정사(政事)는 경(卿)이나 대부(大夫)에게 맡겼다. 그렇게 되자 백관들 간에는 위계 질서가 서지 않게 되었고, 제후들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측근의 신하들은 왕에게 충성스런 간언을 감히 못하였다. 이때 순우곤(淳于곤)이 왕에게 이런 수수께끼를 냈다. 나라 안의 큰 새가 대궐 뜰에 멈추어 있습니다. 3년이 지나도록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왕께서는 이것이 무슨 새인 줄 아십니까?” 왕이 대답했다.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뿐이나 한 번 날면 하늘에 오르며, 울지 않으면 그뿐이나 한 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 후 왕은 여러 현(懸)의 영장(令長) 72명을 조정으로 불러 그 중 한 사람은 상을 주고, 한 사람은 벌을 주었다. 그리고는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제후들이 크게 놀라서 그 동안 침략하여 차지한 제나라 땅을 모두 돌려주었으며, 이로써 제나라의 위엄이 36년간에 걸쳐 떨쳐졌다.

또한 여씨춘추(呂氏春秋) “중언(重言)”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초(楚)나라 목왕(穆王)이 죽고 아들 장왕(莊王)이 즉위하였다. 장왕은 황하 남쪽까지 세력권을 확장한 목왕과는 달리, 밤낮으로 주색에 파묻혀 있으면서 간언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왕의 이런 생활은 어느덧 3년 세월이 흘렀다. 충신 오거(五擧)가 연회석 자리에 나와 이렇게 말하였다.

“언덕 위에 새 한 마리가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이는 어떤 새입니까?” 장왕은 매서운 눈초리로 오거를 보더니 말했다.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니 한 번 날면 하늘까지 이를 것이고, 3년 동안 울지 않았으니 한 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오. 알았으면 물러가시오.” 장왕은 오거의 질문의 의미를 모르는 듯 여전히 음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자 대부(大夫) 소종(蘇從)이 다시 간언을 했다. 장왕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가?” 소종은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눈을 뜨시기를 간언하는 것입니다.” 그 후 장왕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조정으로 나와 정사를 돌보았다. 장왕은 수많은 인물을 다시 등용하는가 하면, 부패와 부정을 일삼는 관리들을 벌 주었다.

불한이율ㅣ不寒而慄

불한이율ㅣ不寒而慄

불한이율ㅣ不寒而慄

○ 춥지 않아도 벌벌 떨 정도로 몹시 두려운 상황

○ 不(아닐 불) 寒(찰 한) 而(이을 이) 慄(떨 률)

사기(史記) 혹리(酷吏)열전에는 혹독한 관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중앙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호족 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채용하였다. 당시, 의종(義縱)이라는 사람은 왕태후의 총애를 받은 누님의 덕택으로 현령과 도위를 지내다가, 남양 태수를 거쳐 다시 정양 태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는 남양태수로 재임하면서, 도위(都尉)였던 영성(成)의 일가를 죽인 바 있어, 이미 법 집행이 엄격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정양 태수로 부임하자, 정양군내의 호족세력을 평정한 후, 2백여 명의 범죄자들을 체포하였다. 동시에 그는 사적(私的)으로 감옥에 드나들며 죄인들을 면회한 사람들을 죄수 탈옥 기도죄로 구속하였다. 의종은 이 자들은 사형수들을 탈옥시키려 하였다라고 판결하고, 그 날 중으로 4백여 명을 전원 죽였다.

이후 군내의 호족들과 백성들은 춥지 않아도 벌벌 떨었으며(其後郡中寒而), 교활한 자들은 알아서 관리에게 협력하여 공무를 도왔다. 寒而은 몹시 두려운 상황을 형용한 말이다.

적우침주ㅣ積羽沈舟

적우침주ㅣ積羽沈舟

적우침주ㅣ積羽沈舟

○ 새털처럼 가벼운 것도 많이 실으면 배가 가라앉는다

○ 積(쌓을 적) 羽(깃 우) 沈(잠길 침) 舟(배 주)

새털처럼 가벼운 것도 많이 실으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①작은 일도 쌓이고 쌓이면 큰 일이 됨 ②또 작은 것, 힘없는 것도 많이 모이면 큰 힘이 됨

작은 물건이라도 꾸준히 모으면 나중에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대표적인 속담이 ‘티끌모아 태산’이고 들어맞는 성어가 塵合泰山(진합태산)이다. 90세 되는 노인이 마을 앞뒤의 산을 대를 이어 옮긴다는 愚公移山(우공이산)이나 도끼를 갈아 바늘 만들기란 磨斧作針(마부작침). 또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水滴穿石(수적천석), 이슬이 바다를 이루는 露積成海(노적성해)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새의 깃이라도 쌓이고 쌓이면(積羽) 배를 가라앉힐 수 있다(沈舟)는 이 성어도 작은 힘을 합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 기원전 403년~221년)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7개 강국을 오가며 외교전을 펼쳤던 張儀(장의)에 의해 이 말이 유래했다. 七雄(칠웅)으로 일컬어졌던 秦楚燕齊韓魏趙(진초연제한위조) 사이에 세력을 넓히려고 쓴 전술이 合從連衡(합종연횡, 衡은 저울대 형, 또는 가로 횡)이다. 장의와 함께 鬼谷(귀곡) 선생에 사사한 蘇秦(소진)은 최강국인 진나라에 맞서려면 6국이 힘을 합쳐야 된다며 合縱策(합종책)을 주장했다. 여기에 맞서 장의는 합종이 일시적 허식이며 진을 섬겨야 안전하다고 설득하여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는데 이것이 연횡책이다.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장의는 위나라의 哀王(애왕)을 찾아가 변설을 늘어놓으며 설득한다. 前漢(전한)시대의 학자 劉向(유향)의 ‘戰國策(전국책)’ 중에서 魏策(위책)에 실린 내용을 보자. 합종론자들은 군주를 설득하면 侯(후)에 봉해지므로 벼슬에 눈이 어두워 유세하기 때문에 현혹되면 나라가 기울어진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제가 듣기에 가벼운 깃털도 쌓이고 쌓이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짐도 모이면 수레의 굴대를 부러뜨리며, 민중이 입을 모아 외치면 쇠도 녹인다고 했습니다(臣聞 積羽沈舟 群輕折軸 衆口鑠金/ 신문 적우침주 군경절축 중구삭금).’ 합종론자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나지 말라는 이야기다. 애왕은 합종에서 탈퇴하고 진나라와 연횡했다.

반문농부ㅣ班門弄斧

반문농부ㅣ班門弄斧

반문농부ㅣ班門弄斧

○ 노반의 문 앞에서 도끼를 자랑한다

○ 班(나눌 반) 門(문 문) 弄(희롱할 농) 斧(도끼 부)

노반의 문 앞에서 도끼를 자랑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잘난 척 함을 비유한다.

춘추시대 노나라에 한 목수가 있었는데 성은 공수고 이름은 바이며 기술이 뛰어나 인기가 대단했다. 노국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노반이라 불렀다. 그는 대들보나 기둥을 만드는데도 꽃을 새기고 문자를 파는 등 못하는 재주가 없었다. 따라서 도끼 씀이 귀신 같고 기교가 신이 민망할 정도로 뛰어났다. 한 자루의 보통 도끼라도 그 손에서 움직이면 나무가 정교하고 곱게 하나의 기구로 다듬어져 누구도 그를 따를 자가 없어 일대 교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당시 젊은 목수가 하나 있었는데 조그만 솜씨를 갓 배웠음에도 안하무인 격으로 항상 도끼와 수예 작품을 들고 다니며 허풍을 쳤다. 어느 날 그는 노반집 앞에 나타나서 큰 소리를 치며 자랑했다.

그의 수공예 작품을 꺼내 들고 지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자랑했다. 그의 기술이 정교함이 여차여차 하고 이런 작품들은 공저의 걸작이라고 자화자찬하면서 도끼를 꺼내어 현장에서 솜씨를 보이기도 했다. 이를 구경하던 그 지방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머리를 들어 그의 등뒤에 있는 노반집 대문을 쳐다보고는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더 참을 길이 없었던지 그 젊은 목수에게 말을 꺼냈다.

젊은 친구! 등뒤에 있는 주택이 위 집인지 아오?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는 까닭도 모른 채 대답을 했다. 그 집이 바로 당대에 명성이 쟁쟁한 목수 노반의 주택이오, 그의 수예품이야말로 천하의 걸작이오, 젊은 친구 한 번 들어가서 참관을 해 보구려.청년 목수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한 뒤 노반의 기교에 대해 탄복한 나머지 머리를 떨구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솜씨에 의하여 만들어진 작품인지라 그는 지기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비범한 걸작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의 기구를 챙겨 가지고는 말없이 자리를 뜨고 말았다.

미생지신ㅣ尾生之信

미생지신ㅣ尾生之信

미생지신ㅣ尾生之信

○ 미생의 믿음, 약속을 굳게 지킴

○ 尾(꼬리 미) 生(날 생) 之(갈 지) 信(믿을 신)

미생의 믿음, ① 약속을 굳게 지킴의 비유. ②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춘추 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尾生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였다. 어느 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전국 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연(燕)나라 소왕(昭王)을 설파할 때 신의 있는 사나이의 본보기로 미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같은 전국 시대를 살다간 장자(莊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장자는 그의 우언(寓言)이 실려 있는《장자》〈도척편(盜 篇)〉에서 근엄 그 자체인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盜 )의 입을 통해 미생을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책형( 刑: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일취월장ㅣ日就月將

일취월장ㅣ日就月將

일취월장ㅣ日就月將

○ 날마다 달마다 성장하고 발전한다, 갈수록 진보함

○ 日(날 일) 就(나아갈 취) 月(달 월) 將(장수 장)

"

날마다 달마다 성장(成長)하고 발전(發展)한다는 뜻으로, 학업(學業)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진보(進步)함을 이른다. 시경(詩經) 주송(周頌)의 경지(敬之)에 유래하는 말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나는 못난 소인배로 비록 총명하지도 신중하지도 않지만維予小子, 不聰敬止. 날로 이루고 달로 넓혀나가 배움을 이어나가 광명에 이를 것이니日就月將, 學有緝熙于光明. 맡은 일을 도와 나에게 밝은 덕행을 보여주오佛時仔肩, 示我顯德行.

원래 이 시는 중국 주(周)나라의 제2대 성왕(成王)에게 신하들이 경계의 말을 올리자, 성왕이 신하들의 말을 마음에 되새기며 답한 것이다. 자신의 자질이 부족하지만 부지런히 노력하면 학문이 높은 곳에 이를 것이니 그런 왕이 될 수 있도록 신하들 역시 훌륭한 학문과 행실을 보여주기를 부탁하는 내용이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있다.

병사지야ㅣ兵死之也

병사지야ㅣ兵死之也

병사지야ㅣ兵死之也

○ 전쟁은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해야 된다는 뜻

○ 兵(군사 병) 死(죽을 사) 之(어조사 지) 也(어조사 야)

전쟁이란 사람이 죽는 것, 전쟁은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해야 된다는 뜻이다

조사(趙奢)는 본래 조(趙)나라의 부세를 징수하는 낮은 관리였다. 한번은 평원군(平原君) 집에서 조세를 내지 않으려고 하자, 법에 따라 그 집의 책임자 아홉 명을 사형에 처하였다. 이때 평원군이 진노하여 조사를 죽이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조나라의 귀공자이십니다.

지금 당신의 집에서 공사(公事)를 받들지 않는 것을 그대로 둔다면 국법은 흔들릴 것이고, 국법이 약해지면 나라도 약해지게 됩니다. 나라가 약해지면 제후들이 병사를 모아 침범할 것이고,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키면 조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공께서 이와 같은 부를 누리실 수 있겠습니까?”

이 일로 조사는 국가 세금을 관장하는 자리에 발탁되었고, 후에는 마복군(馬服君)에 봉해져 염파, 인상여와 같은 지위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진나라와 조나라는 다시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나라가 몇 번이나 싸움을 걸어 와도 염파는 방벽을 굳게 쌓고 끝내 응전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에서 이런 소문을 퍼뜨렸다.

“진나라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뿐이다.” 이 소문은 사실무근이었으나, 조나라 왕은 조괄을 장수로 삼아 염파를 대신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 일을 반대하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조괄의 명성만으로 그를 쓰려고 하시는데, 그것은 거문고 기둥을 풀로 붙여 둔 채 거문고를 타려는 것과 같습니다.

동인협공ㅣ同寅協恭

동인협공ㅣ同寅協恭

동인협공ㅣ同寅協恭

○ 바른 인륜도리를 모두 함께 받든다

○ 同(한가지 동) 寅(범 인) 協(화합할 협) 恭(공손할 공)

우(禹)에게 구덕(九德)을 설명한 뒤 고요(皐陶)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한다. 새로 즉위한 순임금 앞에서 두 중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그중 삼덕만이라도 갖추면 집안을 다스릴 만하니 경대부(卿大夫)는 될 수 있고, 여섯 가지만 갖추면 나라를 다스릴 만한 사람이니 제후가 될 수 있다. 천하를 다스릴 사람은 이러한 덕을 갖춘 사람들을 모두 등용해서 쓸 수 있어야만 천하가 태평해진다.” 그런데 세 가지 또는 여섯 가지 덕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지 않다.

어쨌든 고요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이 대목은 순임금을 향해서 한 말 같다. “하늘의 질서에 법이 있어 다섯 가지 법을 삼가 지키도록 했으니 이 다섯 가지를 두터이 하십시오.

하늘의 등급에는 예가 있어 다섯 가지 등급의 예를 쫓게 하였으니 이 다섯 가지를 쓰도록 하십시오.”天叙有典 勑我五典五惇哉 天秩有禮 自我五禮有庸哉 그리고 “다 같이 오륜과 오례를 받들고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고 착하게 되도록 하십시오”同寅協恭和衷哉라고 말했다.

오전(五典)은 오륜 또는 오교(五敎)와 같다. 그 내용은 부의(父誼) 모자(母慈) 형우(兄友) 제공(弟恭) 자효(子孝)라고 한다.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 관계를 도덕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제시된 기본 윤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례는 천자 제후 경대부 사(士) 서민 등 다섯 가지 계급의 사람들이 지켜야 할 예의를 말한다. 동인과 협공은 모두 ‘함께 공경한다’는 말인데, 구체적으로는 오륜과 오례를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우는 나중에 임금이 되자 고요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곧 죽는 바람에 그 아들을 중용했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

뒤돌아보지 말자.

만 번쯤 다짐하며 달려온 곳입니다.

충실한 오늘은 곧 후회 없는 어제가 되고,

준비된 미래가 된다고 하지만

내가 뒤돌아보지 않음은

어제가 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

멈춤도 전진이라고 합니다.

",

조금...조그만...잠시 쉬었다

내 초라하고 깊은 한숨은 멈추고

다시 달려가겠습니다.

"

-한·꿈·그리움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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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열국ㅣ周遊列國

주유열국ㅣ周遊列國

주유열국ㅣ周遊列國

○ 두루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목적 없이 떠돌다.

○ 周(두루 주) 遊(놀 유) 列(벌일 열) 國(나라 국)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周遊(주유)다. 큰 부담 없이, 꼭 해야 한다는 목적 없이 놀러 다닌다면 늘어진 팔자겠다. 온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으면 周遊天下(주유천하)다. 동생인 世宗(세종)에 왕위를 물려주려 서민으로 가장하고 세상을 돌아다닌 讓寧大君(양녕대군)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풍자시의 대가 김삿갓(金笠/ 김립)이 돈의 기능을 절묘하게 노래한 것에도 등장한다.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도 누구나 너를 환영하고(周遊天下皆歡迎/ 주유천하개환영), 나라도 가문도 흥하게 하니 너의 힘이 가볍지 않도다(興國興家勢不輕/ 흥국흥가세불경).’

목적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 말고 여러 나라(列國)를 돌아다니게 되면 별 소득 없이 떠돈 것은 맞지만 孔子(공자)에게서 나온 성어다. 중국 春秋時代(춘추시대) 대학자이자 사상가인 공자는 자신이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현실정치에 접목하기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모국 魯(노)나라에서 미관말직을 지내다 56세가 되어 형벌을 관장하는 大司寇(대사구)가 되었다. 상인들은 폭리를 취하지 않고 남의 물건이 땅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라가 안정됐다. 노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 나라에서 군주에게 뇌물을 주고 공자를 퇴진시켰다.

실망한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기 위해 13년 동안이나 헤맸다. 공자의 주유는 순탄하지 못했다. 공자가 楚(초)나라에 초빙되어 갈 때 陳(진)과 蔡(채)나라의 대부들이 길목을 막고 사람들을 풀어 포위했다. 자신들이 행했던 병폐들이 드러나 위험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식량이 떨어지고 따르는 사람이 병에 들기도 한 陳蔡之厄(진채지액)의 봉변이다. 鄭(정)나라에선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모두 공자를 찾아 나섰는데 한 사람이 추췌한 모습을 보고 ‘상가의 개(喪家之狗)’라고 표현하는 수모도 당했다.

공자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나라로 다시 돌아와 후진 교육에 힘쓰게 됐다.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유는 공자도 실패할 정도로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