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꽃은 핀다

꽃은 핀다

꽃은 핀다

땡볕이 화살처럼 쏟아지는

돌 틈에서도, 모래 가운데서도

꽃은 핀다

비바람이 내리꽂는 벼랑 끝에서도,

숨을 헐떡거리는 물속에서도

꽂은 핀다

벌나비가 오지 않아도 꽃은 핀다

열매를 맺지 못해도 꽃은 핀다

때려 죽여도 꽃은 핀다

내일 이름 없이 그냥 꺾일 때 꺾일지라도

메마른 세상에 한 줄기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꽃은 그렇게 말없이 활짝 핀다

-김형태-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

어느 토요일이었다.

"미안해. 오늘도 많이 늦을지 몰라."

"우리 하는 일이 그렇지 뭐.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돈 많이 벌어와, 남편."

남편은 주말에도 출근했다. 한꺼번에 몰려든 작업을 하느라 며칠째 쪽잠을 자며 일하고 있었다. 주말에도 함께하지 못하는 게 무척이나 미안한지, 출근하는 남편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손을 흔들었다.

남편을 보내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청소와 밀린 빨래를 했다. 그리고는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면서 한가하게 책을 읽는 주말. 그렇게 책을 읽다가 스르르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 안은 어둑해져 있었다. 이어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역시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렸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방 안은 어두웠고, 나는 혼자였다.

손을 더듬거리자 딱딱한 책 모서리가 만져졌다. 그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다.

한참 뒤, 옆으로 돌아누웠을 때 나는 곁에 누군가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남편이었다. 남편은 이불도 덮지 않고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한쪽 이어폰을 뺐다. 그러자 새근새근,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울컥, 마음이 이상했다.

나는 그가 외로워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쓸쓸해질 수가 있다니. 쓸쓸하고 외로운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

앞으로 살아갈 불투명한 미래가 만져지는 것 같아 손끝이 저릿했다.

그럼에도 우린 꿋꿋이 살아가겠지. 몇번이고 텅텅 비어 낯설고 어둑해질 이 세상에서, 내가 외로울 땐 당신이 곁에.

당신이 외로울 땐 내가 곁에. 그렇게 우린 함께 살아가겠지.

가만히 남편의 손목을 잡아보았다. 손마디에 뛰는 그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오래도록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삶에 함께 있어 줘서 고맙다고...

"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중에서 –

"

조금 더 위로가 필요할 때

조금 더 위로가 필요할 때

조금 더 위로가 필요할 때

한 마디 말에 상처 받고

한 마디 말에 문 닫아건다 해도

마음은 희망을 먹고 산다

꽃 만진 자리에 향기가 남아 있듯

묻어 있는 아픈 흔적 지우기 위해

지금은 조금 더 위로가 필요할 때

카랑코에 떡잎이 햇빛을 먹고 살듯

마음은 기쁨을 먹고 산다

행복한 상태에선 더 보탤 것 없으니

지금은 조금 더 미소가 필요할 때

마음은 위로를 먹고 산다

-김재진-

수선화에게

수선화에게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

바람은

바람은

바람은

내게 살며시

다가온 이 바람은

어디서 무얼 하러 왔을까?

머물지 않고

끝없이 스쳐만 가는

이 바람은

어디로 무얼 하러 가는 걸까?

살짝 다가왔다가

수줍어 살그머니

떠나가는 바람은

하고 싶은 말은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온종일 휘파람만

쓸쓸히 불어 대는

네 모습 같구나

-이외희-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시간의 재가 되기 위해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아침보다는 귀가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강물 위에 저무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남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거나이별하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세상에 뿌리 하나 내려두고 사는 일이라면

먼 이별 앞에 두고 타오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 추운 겨울 아침아궁이를 태우는 겨울

소나무 가지 하나가꽃보다 아름다운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겠느냐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어둠도 제 살을 씻고 빚을 여는 아픔이 된다

-문정희-

가을 엽서

가을 엽서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내 마음을 주고 싶은 친구

내 마음을 주고 싶은 친구

내 마음을 주고 싶은 친구

생각이 깊은 친구를 만나고 싶네

그런 친구는 정신이 건강하여

남의 아픔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 하진 않겠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품을 두르고

몇 푼 안되는 콩나물값에 핏대 세우는 까탈스런

친구보다는 조그만 기쁨에도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목젖이 다 드러나도록

웃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나고 싶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빨간 립스틱 쓱쓱 문질러 바르고

비 오는 날 예고 없이 찾아와서는

애호박 채 썰어 전을 부쳐 먹고

변두리 찻 집에서 커피 한잔을 마셔도

마음이 절로 편한 친구였으면 좋겠네

때로는 억울한 일 횡재한 일

울다가 웃다가

소낙비 내리듯 거침없이 쏟아부어도

그저 넉넉한 가슴으로 그래그래 하며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삶의 긴장을 풀어주는

큰 나무 같은 친구였으면 좋겠네

마음 씀씀이가 비 그친 하늘 닮은 친구 하나

내 우정의 빈터에 조심스레 들이고

그에게 가장 미더운 친구

그에게 가장 순수한 친구

그에게 가장 힘이 되는 친구

그에게 가장 의지가 되는 친구로

나도 그의 맑은 하늘이 되고싶네

"

-여백이 있는 풍경 중에서-

"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워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워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워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

비로소 가만 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 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러 싸여야 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주는 사람과

얘기 거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히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래서 우리의 지난 날들은 아름다웠으니...

앞으로 절대로 초초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에

영원한 느낌을 채워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들의 추억과 재산이라고

우리만 아는 미소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미인이 못되어도

일등이 못되어도

출세하지 못해도

고루, 고루 갖춰놓고 달리지는 못해도

우정과 사랑은 내 것이었듯이

아니 나아가서 우리의 것이었듯이

앞으로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중에서-

"

좋은 때

좋은 때

좋은 때

언제가 좋은 때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지금이 좋은 때라고

대답하겠다

언제나 지금은

바람이 불거나

눈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햇빛이 쨍한 날 가운데 한 날

언제나 지금은

꽃이 피거나

꽃이 지거나

새가 우는 날 가운데 한 날

더구나 내 앞에

웃고 있는 사람 하나

네가 있지 않으냐

"

-나태주, 그 길에 네가 먼저 있었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