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6일 일요일

보원이덕ㅣ報怨以德

보원이덕ㅣ報怨以德

보원이덕ㅣ報怨以德

○ 원수에게 덕으로 보답하라는 말

○ 報(보답할 보) 怨(원수 원) 以(써 이) 德(덕 덕)

원수를 덕으로 갚는다(報怨以德). 어려운 일은 쉬운 일에서 계획된다. 큰 일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 천하의 모든 큼 일은 반드시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이르므로 성인은 끝까지 크게 되려고 하지 않으므로 크게 될 수 있다.

대개 가볍게 승낙을 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성이 적고, 너무 쉬운 일은 반드시 어려운 일이 많다. 이 때문에 성인은 도리어 쉬운 것을 어렵게 여기므로 마침내는 어려운 것이 없게 된다.” 어떤 사람과 원수 관계가 되면, 그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자가 있고, 반면에 은덕으로써 갚는 자가 있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일은 그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원한을 누그러뜨리고 은덕으로서 갚는다는 것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노자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노자는 천하의 모든 일은 처음부터 크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작고 쉬운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가도멸괵ㅣ假道滅虢

가도멸괵ㅣ假道滅虢

가도멸괵ㅣ假道滅虢

○ 길을 빌려 괵국을 멸하다.

○ 假(거짓 가) 道(길 도) 滅(꺼질 멸) 虢(범 발톱 자국 괵)

길을 빌려 괵국(虢國)을 멸(滅)하니, 진헌공(晉獻公)이 우국길을 빌려 괵국(虢國)을 멸(滅)함. 나라 간의 입술과 이와 같은 관계가 春秋時代(춘추시대) 때 소국이었던 虢(괵)나라와 虞(우)나라였다. 두 나라는 형제국이라 이웃의 강국 晉(진)이 호시탐탐 노릴 때 힘을 합치는 사이였다. 虢이라는 어려운 글자는 ‘나라 이름, 범발톱자국 괵‘인데 이 성어 외에는 쓰임이 적다.

공자가 편찬한 ‘春秋(춘추)’에는 주석서로 春秋三傳(춘추삼전)이 있는데 公羊傳(공양전), 穀梁傳(곡량전) 그리고 左氏傳(좌씨전)이다. 그중 左丘明(좌구명)이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지은 좌씨전은 左傳(좌전)이라고도 하고 이 이야기는 여기에 실려 있다. 周興嗣(주흥사)가 지은 千字文(천자문)에도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토에 모여 맹세했다(假途滅虢 踐土會盟/ 가도멸괵 천토회맹)’란 구절이 있다.

春秋五覇(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晉文公(진문공)의 아버지 獻公(헌공)이 왕위에 있을 때였다. 헌공은 괵나라를 치려 하는데 좋은 계책이 없을까 대부 荀息(순식)을 불러 물었다. 이에 우공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진나라의 명마인 屈産之馬(굴산지마) 네 마리와 구슬 垂棘之璧(수극지벽)을 보내 환심을 산 뒤 길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사신으로 온 순식에게서 진 헌공이 우나라에 길을 빌려 괵나라를 치려(假道於虞以伐虢/ 가도어우이벌괵) 한다는 말을 들고 우공은 화를 냈지만 가져온 선물을 보자 단번에 마음이 흔들렸다. 우의 책사 宮之奇(궁지기)가 극구 간했다. ‘괵이 망하면 우도 망합니다. 덧방나무(바퀴살의 힘을 돕는 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립니다(輔車相依 脣亡齒寒/ 보거상의 순망치한).’ 우공이 간언을 듣지 않고 길을 빌려주자 궁지기의 우려대로 괵을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단숨에 우를 공략했다.

조궁즉탁ㅣ鳥窮則啄

조궁즉탁ㅣ鳥窮則啄

조궁즉탁ㅣ鳥窮則啄

○ 새가 쫓기면 부리로 쫀다.

○ 鳥(새 조) 窮(다할 궁) 則(곧 즉) 啄(쫄 탁)

새가 쫓기다가 도망(逃亡)할 곳을 잃으면 도리어 상대방(相對方)을 부리로 쫀다는 뜻으로,약한 자도 궁지(窮地)에 빠지면 강적에게 대든다는 말

약한 자를 계속해서 괴롭히게 되면 최후의 힘을 다하여 강적을 해친다. 아무리 궁지에 몰린 적이라도 씨를 말릴 듯 끝까지 공격하지 말라는 窮寇勿迫(궁구물박)이란 孫子兵法(손자병법)의 가르침을 따라야 피해가 적다. 性惡說(성악설)을 주창한 戰國時代(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荀況(순황)은 유학을 재정비하여 ‘荀子(순자)’를 저술했다. 哀公(애공)편에 이 성어가 사용됐다. 내용을 보자.

孔子(공자)의 수제자인 顔淵(안연)이 魯(노)나라 定公(정공)을 모실 때였다. 東野畢(동야필)이란 사람이 말을 잘 부리기로 소문났다. 정공이 그에 대해 칭찬하며 안연에게 의견을 물었다. 좀처럼 남을 비방하지 않는 인격자 안연이 시큰둥해 하면서 동야필이 장차 말을 잃을 것이라고 답했다. 정공이 실망하여 기분이 상해 있었는데 며칠 후 과연 동야필이 말을 잃었다. 정공이 안연에게 그리 될 줄 어찌 알았는지 물었다. 안연은 ‘새가 궁지에 몰리면 쪼고, 짐승이 궁지에 몰리면 할퀴며,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거짓을 부리게 됩니다(鳥窮則啄 獸窮則攫 人窮則詐/ 조궁즉탁 수궁즉확 인궁즉사)’라면서 동야필이 험난한 곳을 지날 때도 평지와 똑 같이 말을 다그치니 달아날 줄 알았다고 했다.

취모멱자ㅣ吹毛覓疵

취모멱자ㅣ吹毛覓疵

취모멱자ㅣ吹毛覓疵

○ 털 사이를 불어가면서 흠을 찾는다

○ 吹(불 취) 毛(터럭 모) 覓(찾을 멱) 疵(허물 자)

털 사이를 불어가면서 흠을 찾는다는 뜻으로,남의 결점(缺點)을 억지로 낱낱이 찾아내는 것을 말함.

戰國時代(전국시대) 말기 법치주의를 주창한 韓非(한비)와 후학들의 논저 ‘韓非子(한비자)’에 비유가 처음 나온다. 군주와 신하간의 안정적 관계를 순리에 의해 이끌어야 한다는 큰 원칙 大體(대체)편에 들어 있다. 부분을 요약해보자.

현명한 군주는 조그만 지식으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며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법술에 의해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상벌에 의해 시비를 분별해야 한다. 하늘의 이치에 역행하지 않고 사람의 본성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어진다. ‘터럭을 불면서 남의 작은 흠을 찾으려 하지 않으며, 때를 씻어 알기 힘든 상처를 찾지 않는다(不吹毛而求小疵 不洗垢而察難知/ 불취모이구소자 불세구이찰난지).’ 높은 자리에서 백성을 다스리려면 사소한 것까지 들춰내다간 신망을 잃게 되리라는 가르침이다.

고려 말의 문신이자 대학자 李穡(이색)의 시 구절에도 등장한다. 출세 늦음을 한탄하며 서로 다투어 남을 모함하는 세태를 꼬집는 부분에서다. ‘터럭 불어 흠을 찾아 서로 헐뜯기도 하는데, 몸을 숨겨 남 모략하니 더욱 가소로워라(吹毛求疵或相詬 匿影射人尤可嗤/ 취모구자혹상후 닉영사인우가치).’ ‘牧隱詩稿(목은시고)’에 실려 있다.

수석침류ㅣ漱石枕流

수석침류ㅣ漱石枕流

수석침류ㅣ漱石枕流

○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

○ 漱(양치질 수) 石(돌 석) 枕(베개 침) 流(흐를 류)

① (실패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억지를 씀. 억지로 발라 맞춰 발뺌을 함. ② (남에게 지기 싫어서 좀처럼 체념을 안하고) 억지가 셈의 비유.

진(晉:265∼317)나라 초엽, 풍익 태수(馮翊太守)를 지낸 손초(孫楚)가 벼슬길에 나가기 전, 젊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대부간에는 속세의 도덕 명문(名聞)을 경시하고 노장(老莊)의 철리(哲理)를 중히 여겨 담론하는 이른바 청담(淸談)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래서 손처도 죽림 칠현(竹林七賢)처럼 속세를 떠나 산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친구인 왕제(王濟)에게 흉금을 털어놓았다.이때 \돌을 베개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枕流漱石\고 해야 할 것을, 반대로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漱石枕流\고 잘못 말했다. 왕제가 웃으며 실언임을 지적하자 자존심이 강한데다 문재(文才)까지 뛰어난 손초는 서슴없이 이렇게 강변했다."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옛날 은사(隱士)인 허유(許由)와 같이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라네."

하족괘치ㅣ何足掛齒

하족괘치ㅣ何足掛齒

하족괘치ㅣ何足掛齒

○ 말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일

○ 何(어찌 하) 足(발 족) 掛(걸 괘) 齒(이 치)

말을 할 자리가 아닌데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있다. 역시 이럴 때는 침묵이 제일인데 꼭 말해야 한다면 어찌 족히(何足) 말을 할 필요(掛齒)가 있겠는가 하며 물러서는 것도 방법이다. 말을 꺼낼 가치가 없는 사소한 일이라는 뜻도 된다. 이 성어가 처음 유래한 것은 중국 秦(진)나라의 始皇帝(시황제)를 이어 받은 2세 황제 胡亥(호해)의 어전회의에서다. 아무리 어리석고 통일왕국을 망하게 했더라도 막강 권력의 황제 앞이니 바른 말이 나오기 어렵다. 언변과 문학에 뛰어난 박사 叔孫通(숙손통)이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호해가 왕위에 오르고부터 나라가 어지러워져 각지에서 군웅들이 궐기했다. 농민들을 이끌던 陳勝(진승)이 반란을 일으켜 張楚(장초)를 세웠다. 학정에 시달리던 여러 지역에서 호응하여 조정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다급해진 호해가 박사들과 여러 유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구동성 반역이라며 토벌해야 한다고 했다. 황제가 크게 노한 얼굴이 되자 숙손통이 나섰다. 나라가 통일되고 법령이 갖춰져 있으니 모반이 아니라며 말한다. ‘이들은 쥐나 개와 같은 좀도둑일 뿐 그것을 입에 담아 거론할 가치도 없습니다.’ 치아 사이에 넣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은 의논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숙손통은 위기를 넘겼지만 황제의 심기만 살피고 바른 간언을 못해 진나라는 망했다. ‘말이란 탁 해 다르고 툭 해 다르다’는 말이 있다. 같은 내용이라도 표현하는데 따라 아주 다르게 들린다. 잘못을 보고도 바로잡지 않고 침묵을 지키면 그 때는 금이 아니다.

갯버들

갯버들

갯버들

이름 : 갯버들

학명 : Salix gracilistyla

과명 : 버드나무목

분포 : 한국·일본·중국·우수리강(江) 연안

크기 : 높이 1∼2m

개화 : 4월

꽃말 : 포근한 사랑, 노력

포류(蒲柳)·수양(水楊)·세주류(細柱柳)라고도 한다. 강가에서 많이 자란다. 높이 1∼2m이고 뿌리 근처에서 가지가 많이 나오며 어린 가지는 노란 빛이 도는 녹색으로 털이 있으나 곧 없어진다.

잎은 거꾸로 세운 바소꼴 또는 넓은 바소꼴로 양 끝이 뾰족하고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의 길이는 3∼10mm이다. 잎 표면은 털이 덮여 있다가 없어지고, 뒷면은 털이 빽빽이 나서 흰 빛이 돌거나 털이 없는 것도 있다.

꽃은 단성화로 4월에 잎겨드랑이에서 어두운 자주색 꽃이 핀다. 수꽃이삭은 넓은 타원형으로 수술이 2개이고, 암꽃이삭은 긴 타원형으로 꿀샘이 1개이며 붉은색이다. 포는 긴 타원형으로 털이 있고 암술머리는 4개이다.

열매는 삭과로서 긴 타원형이며 길이가 3mm 정도이고 털이 있다. 4∼5월에 덜 익은 열매를 그대로 식용한다. 제방의 방수림으로 적당하며 1∼2년생 가지는 꽃꽂이 소재로 사용된다. 내한성과 맹아력이 크며 오리나무·키버들 등과 함께 섞여 자란다. 한국·일본·중국·우수리강 연안 등지에 분포한다.

-사진 : 임규동의 사진세상-

의이명주ㅣ薏苡明珠

의이명주ㅣ薏苡明珠

의이명주ㅣ薏苡明珠

○ 율무를 빛나는 구슬로 보다, 억울한 수뢰 혐의

○ 薏(율무 의) 苡(질경이 이) 明(밝을 명) 珠(구슬 주)

수레에 싣고 온 율무를 뇌물로 받은 明珠(명주)라고 옭아매는 바람에 억울한 누명을 썼다. 터무니없는 수뢰의 참소를 받거나, 반대로 근거 없이 남을 비방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薏(의)는 ‘억’으로도 읽혀 薏苡明珠(억이명주)라고도 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 동안 쌓은 명예가 땅에 떨어진 사람은 後漢(후한)의 명장이었던 馬援(마원, 기원전14~기원후49)이다. 光武帝(광무제)를 도와 북방 이민족을 평정하고, 남쪽의 베트남 북부 交趾(교지)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흉노를 정벌할 때 말가죽으로 자기의 시체를 싼다는 馬革裹屍(마혁과시, 裹는 쌀 과)의 결의를 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원이 교지를 정벌하러 갔을 때 땅은 비록 황폐했지만 율무라는 식물이 생산되고 있었다. 그 열매를 먹으면 몸이 건강해지고 풍토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했다.

마원은 교지에 있을 때 부하와 함께 자주 복용했고, 임무를 마치고 철군할 때 종자로 삼기 위해 한 수레 가득 싣고 돌아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싣고 온 것이 남방의 진주나 코뿔소 뿔일 것(以爲前所載還 皆明珠文犀/ 이위전소재환 개명주문서)이라며 매우 부러워했다. 犀는 무소 서. 조정에서도 뒷말이 있었으나 공을 세우고 돌아온 마원에게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몇 년 후 마원이 변방 정벌 중 전장에서 숨지자 황제의 사위인 梁松(양송)이 옛날 수레 한 가득 보물을 싣고 온 적이 있다고 상소하는 바람에 작위가 모두 몰수되었다. 마원의 부인이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바람에 진상을 알게 된 황제는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장례를 후하게 치르게 했다. ‘後漢書(후한서)’ 마원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복수불반분ㅣ覆水不返盆

복수불반분ㅣ覆水不返盆

복수불반분ㅣ覆水不返盆

○ 한번 쏟은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

○ 覆(다시 복) 水(물 수) 不(아닐 불) 返(돌이킬 반) 盆(동이 분)

한번 쏟은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뜻으로, ①한번 헤어진 부부(夫婦)가 다시 결합(結合)할 수 없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한 말 ②한번 끝난 일은 되풀이 못함

주(周)의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의 주왕을 몰아 내는데 큰 공을 세워 후에 제(齊)나라의 왕이 된 강태공(姜太公)이 벼슬하지 아니했을 때 그의 아내 마씨(馬氏)는 남편이 학문(學問)에만 열중(熱中)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理由)로 집을 나가 버렸다. 그 뒤 문왕에게 등용(登用ㆍ登庸)되어 공을 세우고 제(齊)나라 왕이 되자 마씨가 강태공(姜太公)의 앞에 나타나 거두어 줄 것을 원했다. 그러자 물 한 동이를 길어오게 한 다음 그 물을 땅에 쏟아 담아 보라고 했으나 담지 못했다. 강태공(姜太公)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별(離別)했다가 다시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엎지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약능이경합(若能離更合)이나 복수정난수(覆水定難水)라 하고 마씨를 아내로 맞아 들이지 않았다

단도직입ㅣ單刀直入

단도직입ㅣ單刀直入

단도직입ㅣ單刀直入

○ 혼자서 칼을 휘두르고 거침없이 적진으로 쳐들어가다.

○ 單(홑 단) 刀(칼 도) 直(곧을 직) 入(들 입)

혼자서 칼을 휘두르고 거침없이 적진(敵陣)으로 쳐들어간다는 뜻으로, ①문장(文章)이나 언론(言論)의 너절한 허두(虛頭)를 빼고 바로 그 요점(要點)으로 풀이하여 들어감 ②생각과 분별(分別)과 말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진경계(眞境界)로 바로 들어감

군말이나 인사말 따위 없이 곧장 요지를 말함. 에둘러 표현하는 대신 직접 문제점을 지적함. 홀로 칼을 들고 곧장 들어가다. 홀로 적진을 향해 한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곧장 쳐들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