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1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1편
선조가 집권하던 16세기 말. 조선의 조정은 서로 뜻이 같은 관리들끼리 뭉치며 당이 만들어졌는데, 이 당들을 ‘벗들이 뭉친 조직’이라 하여 ‘붕당(朋黨)’이라 했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 이후 동인은 북인과 남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져 흔히 ‘사색당파(四色黨派)’라 한다. 조선 시대에 왕비는 국왕의 정실부인으로서 중궁(中宮)의 지위에 있던 여인이다. 임금과 함께 ‘전하(殿下)’로 불리며 국모(國母)로서 자리매김하던 존재로, 처신 여하에 따라 정국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드라마틱한 인물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냈다. 그녀의 생애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가 쓴 《계축일기》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오늘날까지도 광해군 시대를 담은 수많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정비(正妃)인 의인왕후가 죽고 맞이한 선조의 계비(繼妃)이다. 사극(史劇) 속 비련의 주인공으로 인목대비라는 호칭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조선 전기에는 왕후가 승하하면 3년 뒤에 후궁을 왕비로 승진시키는 형식을 택했지만, 선조는 중종이 문정왕후를 외부에서 간택한 전례에 따라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14세 이상의 딸을 가진 모든 양반가에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간택된 김제남의 딸이 바로 인목왕후이다. 선조의 나이 51세, 인목왕후는 19세였다.
인목왕후 김씨는 1584년(선조 17년)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아버지 김제남은 서인이었지만, 당파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가문도 중종 때 권신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인목왕후가 왕비에 책봉되자 제일 당황한 인물은 세자 광해군이었다. 자신보다 9살이나 어린 새어머니가 거북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만약 적장자(嫡長子) 아들이라도 낳는 날에는 후궁 소생인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 지기 때문이다.
인목왕후는 1603년(선조 36년)에 정명공주를 낳고, 3년 뒤 1606년(선조 39년)에는 적장자(嫡長子) 영창대군을 낳았다. 고대하고 고대했던 적장자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선조 입장에서 늘그막에 얻은 막내아들은 하늘의 축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죽었고, 후궁들이 낳은 아들들만 있었는데, 새장가를 든 젊은 부인에게서 55세의 늦은 나이로 적장자를 얻었으니 선조는 몹시 기뻤다. 하지만, 광해군으로서는 매우 불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장차 혹시라도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날 불씨가 생겼기 때문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