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1편
■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1편
‘충무공’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순신장군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諡號:사후 추증)를 받은 사람은 이순신 외에 권율, 김시민, 남이장군 그리고 정충신 등이 있다. 충무공 정충신장군은 한마디로 노비에서 포도대장에 까지 오르는 인생역전을 이룬 인물로, 강직하고 청렴하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충신(鄭忠信:1576년~1636년)의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晚雲), 본관은 금성 정씨(錦城)이다. 고려의 명장 정지(鄭地)의 후손인 아버지 정윤은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였는데, 어느 날 밤, 무등산 청룡과 북악의 백호가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집안의 식비(食婢)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 영천 이씨가 노비 신분이라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때문에 노비 신분이 되었다. 충신(忠信)이라는 이름은 그의 9대 할아버지인 경렬공 정지(鄭地)장군과 같은 훌륭한 충신(忠臣)이 되라는 뜻에서 그를 아끼던 이항복이 지어준 이름이라 한다. 정충신은 17세 때 임진왜란 중 광주목사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권율이 의주로 피신해 있는 선조에게 올릴 장계를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왜군이 득실거리는 전장을 뚫고 위험한 임무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17세의 어린 정충신이 자청(自請)해 나서고는 왜군으로 점령당한 지역을 단신으로 뚫고 선조가 머물고 있던 행재소(行在所)에 무사히 도착하여 임무를 완수하였다. 선조는 그 공으로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시켜주었다. 이 후에도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여 권율의 신임을 받으며, 적지(敵地)를 정찰하는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총명한 그를 아들같이 사랑하며 사서(四書)를 가르쳤는데,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합격하여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분이 상승되고 단번에 출세를 한 사람은 교만해지고 초심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정충신은 항상 겸손했고, 키는 작지만 씩씩했고 덕장(德璋)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