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주부부의 편지 1편
■ 곽주부부의 편지 1편
1989년 4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석문산성에 있는 진주 하씨(晉州河:180~1652(?))묘를 이장하던 중 무덤 속에서 한글 필사(筆寫:베껴씀) 편지가 발견되었다. 주인공인 진주 하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곽재우(郭再祐)의 사촌 조카인 곽주(郭澍:1569~1617)의 둘째 부인이다. 정확한 생몰 연대를 알 수 없으나 1652년 언간이 확인됨에 따라 17세기 중기에 생존하였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친정은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일대로 곽주가 살았던 현풍 곽씨 집성촌 솔례 마을에서 가까운 곳이다. 곽주는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진주 하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광주 이씨와의 사이에 큰아들 곽이창이 있었다. 진주 하씨와의 재혼 후에 큰아들인 곽이창과 진주 하씨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자, 진주 하씨가 분가(分家)하여 곽주는 소례에서, 하씨는 논공에서 각각 떨어져 살았다. 그래서다른 곳에서 왕래하는 생활을 하면서 편지를 통해 많은 사연들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을 빼고는 모두 하씨 소생이다.
함께 출토된 유물에는 부녀자가 나들이할 때 머리에 써서 몸을 가리던 장옷을 비롯하여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창의(氅衣), 저고리 등 의복류와 이불, 베개, 돗자리 등 침구류, 머리 빗는 도구를 담아 두던 빗첩 등 81점이 있다. 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17세기 초 복식(服飾)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편지글은 현전(現傳)하는 편지들 중 가장 내용이 풍부하고, 흥미로운 사연이 많은 자료이다. 특히 17세기 초에는 당코깃(한복의 상의 부분에서, 여밈 끝이 버선코처럼 뾰족한 모양의 깃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유행) 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유행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엽까지도 목판깃(넓적하고 맵시가 없게 단 옷깃) 여자저고리가 착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또한 부녀자의 주변 생활을 한글로 쓴 170여 점의 서간문들은 당시 언어와 경상도 지역의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993년 중요민속자료 제229호로 지정된 진주하씨 묘 출토 유물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토된 간찰(簡札:편지)은 주로 남편인 곽주가 부인인 하씨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에서 손님맞이, 음식 장만, 제사 준비, 자녀 양육 등 다양한 생활 주제를 가지고 부부간에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편지로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의 조선시대는 각 종 자연재해와 대기근으로 평화로운 날이 없을 정도로 위기의 시대였다. 대기근으로 인한 흉작과 이로 인한 전염병이 사회 전반에 가했을 충격은 곽주의 편지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편지에는 곽주를 비롯하여 자녀들의 병치레에 대해 걱정하는 구절을 자주 볼 수 있다. 편지에서는 꿀에 소주를 타거나 석웅황, 생강 등으로 병을 치료하는 등 음식을 이용한 다양한 치료법이 등장한다. 이 출토 편지와 유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일상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17세기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과 편지에 담긴 인간적인 진솔함을 느낄 수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