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1편
■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1편
정남국(鄭南局:1897-1955)선생은 한평생 항일운동을 하다가 수감과 석방을 반복했는데, 생애 58년간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수감된 것이 무려 93회, 기간은 약 10년으로 감옥살이 횟수는 항일민족운동자 중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선생은 일본어를 잘했기에 재판과정에서 변호사 없이 본인을 변론하여 감형을 받았기에 그나마 10년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20년도 넘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남국은 1897년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의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5세가 넘도록 가정이 빈곤하여 완도읍으로 유학할 수가 없어 바다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선생은 또래들이 완도읍에 유학하여 사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완도 유학을 갈망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부친에게은 어려운 형편이지만 선생을 완도사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입학은 하였으나 어려운 형편에 월사금(학비)을 감당할 수가 없어 이듬해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해조류 수집상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습득하였다. 여기에서 4~5년간 모은 돈을 통틀어 일본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2학기에 중퇴하고 고향인 소안도로 다시 돌아왔다.
1914년 소안도에 ‘배달청년회’가 결성되자 부회장을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항일투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완도에서 만세운동을 하고, 전남노동연맹 상임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사람인 송내호의 권유로 상해임시정부 지원군자금 모금원이 되었다. 당시에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감시를 피하고자 엿장수로 변장하여 전남 일원을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동지들 간 비밀연락책이 되었다.
스스로 ‘일황 사형선고장’을 만들어 엿판 아래 숨겨 다니면서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엿장수는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엿장수독립운동가’로 알려지면서 다시 ‘소쿠리장수’로 변장하여 전남 일대를 누볐다. 당시 전라도 동지들 간에는 ‘엿장수 정서방’ 또는 ‘소쿠리장수 정도령’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렵게 모은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한양에서 출발 신의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헌병대 검문이 삼엄하고 자신은 전과가 있기에 동지에게 자금 보따리를 맡기고 검문이 끝나면 만나자고 약속하고, 만약 내가 체포되더라도 이 자금은 임시정부에 꼭 전달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예상대로 선생은 검문에서 다른 전과 때문에 체포되어 신의주 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