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성왕 1편
■ 백제 성왕 1편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위축되어 있던 백제의 중흥(中興)과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백제의 왕은 제26대 성왕(聖王:재위523~554)이다.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는 왕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왕으로 가야를 백제의 영향력에 넣고 고구려에게 복수하려는 집념의 소유자로 묘사하고,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고 찬양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모두 성왕(聖王)으로 칭하였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다.』라고 성왕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성왕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비운의 임금이다.
성왕(聖王)의 이름은 명농(明穠)으로,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3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왕이다. 동성왕과 무령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하였고, 재위 16년(538년)에 사비(泗沘)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기존 수도였던 웅진성(熊津城)은 계획된 수도 선정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침으로 위례성을 빼앗기자, 내쫓기는 형태로 문주왕이 급히 천도한 것으로, 전시수도이며 임시수도의 성격이 컸다. 위성 지도로 공주 공산성 주변을 보면 주변 산세와 강줄기가 침략을 방비하기에는 도움이 되지만, 터가 좁아서 오래도록 쓸 나라의 중심지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 사비성(泗沘城)은 금강의 중류, 백마강이 휘감아 흐르고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다. 백마강을 통해 서해로 통하고, 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온갖 물산이 모이는 풍요로운 곳. 사비는 농사지을 땅이 넓은데다가 바다를 통해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기에도 좋았다. 이미 동성왕 때부터 주목하고 준비해온 일을 이어받아 무령왕을 거쳐 드디어 성왕은 오랜 시간을 두고 부지가 넓고 웅진성과도 멀지 않은 사비로의 천도 계획을 진행했다. 철저하게 계획된 선진적인 계획도시, 세계로 열린 국제도시인 사비성이 모습을 드러냈고, 백제의 사비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사방으로 넓게 뻗은 도로, 네모반듯하게 바둑판처럼 계획된 도시계획, 왕궁과 관청, 공방, 사원, 능묘, 민가가 채워지고, 왕궁 배후엔 부소산성과 왕도 둘레를 두른 나성(羅城)이 완성되었다. 백마강으로 이어진 나루엔 하루에도 몇 십, 몇 백 척의 배가 백제 전국과 중국, 일본 등으로 왕래했다. 그 규모는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엄청난 대도시였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잿더미가 되었으나, 부소산성 앞 관북리 유적으로 보면 백제의 왕궁과 부속 건물터, 도로 등이 출토되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