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일요일

국혼國婚 1편

국혼國婚 1편

국혼(國婚)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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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식은 조선시대 왕실의 최고 축제 중의 하나였다. 왕세자의 혼례식이 일반적이었지만 계비를 맞이하는 경우 숙종, 영조의 경우처럼 왕의 혼례식도 몇 차례 거행되었다. 왕실에서 혼례식이 열리면 총괄 본부인 가례도감이 구성되었고,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정승급에서, 부책임자인 도제는 판서급에서 임명했다. 도제 3인 중 2인은 호조판서와 예조판서인데 의식 절차는 예조판서가, 행사에 들어가는 총 비용은 호조판서가 집행했다. 행사의 실무를 맡은 사람은 도청이나 낭청인데 현직에 있는 관리들이 겸직하고 행사가 끝나면 원래 직책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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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婚)은 육례(六禮: 납채. 납폐, 고기, 친영. 부현구고. 묘현)로 진행되었다.

<의혼(議婚) - 사가의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것이다. 이것은 간택 과정이다.>

1. 납채(納采) - 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으로, 약혼식이라 보면 된다.

2. 납폐(納幣) -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것으로, 폐백을 받는 것이라 보면 된다.

3. 고기(告期) - 왕비 책봉의 날짜를 잡는 것이다.

4. 친영(親迎) -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색시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왕은 직접 친영을 행할 수 없으므로 대신 사자를 보낸다. 친영은 초저녁에 행한다. 따라서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치르는 시각은 밤이 된다. 밤에 예를 치러야 바로 초야를 치를 수 있다.

5. 부현구고(婦見舅姑) - 첫날밤을 치른 신부가 시부모를 뵙는 의식이다.

6. 묘현(廟見) - 시집온 신부가 사흘만에 사당의 조상님들을 뵙는 의식이다. 왕비의 경우는 당연히 종묘에서 예를 치러야 한다. 왕비는 이외에 중국 황제의 고명장을 받는 절차가 또 있다.

이런 절차는 당연히 일반 사가의 혼례보다 훨씬 복잡하고 화려했다. 육례 중에서도 최고의 의식은 친영으로 오늘날 예식장 등에서 행해지는 결혼식에 해당한다. 친영은 별궁에서 신부수업을 받고 있던 왕비를 궁궐에 모셔오는 의식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혼례식을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담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의 ‘반차도(班次圖)’에는 혼례식 현장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돼 있다. ‘반차도(班次圖)’는 ‘지위와 임무에 따라 배치한 그림’이란 뜻이다.

반차도(班次圖)에는 당시의 의장물을 비롯하여 복식, 악기, 말 등이 오늘날의 동영상 자료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앞부분에는 왕의 행차를 앞에서 인도하는 병력과 함께 왕의 존재를 알리는 둑기(纛旗·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가 보인다. 혼례식은 크게 왕의 가마가 중심이 되는 어가(御駕) 행렬과 왕비의 가마가 중심이 되는 왕비 가마 행렬로 구성된다.

왕의 행렬 바로 뒤에는 문무백관과 군사 지휘관 등 왕을 수행하고 호위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왕의 행렬에 이어 왕비의 행렬이 등장하는데, 왕비 책봉 문서인 교명(敎命)을 담은 교명 요여(腰輿)와, 왕비의 도장인 금보(寶)와 옷을 담은 가마가 먼저 나타나고 이어서 왕비의 가마가 보인다. 왕의 가마는 문을 열어 지나가는 군중들이 왕의 모습까지 직접 볼 수 있게 했으나, 왕비의 가마는 문을 닫아 왕비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했다. 친영 행렬의 뒷부분에는 뒤에서 왕을 경호하는 후사대(後射隊)가 등장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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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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