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난설헌 1편
■ 허난설헌 1편
허난설헌은 조선이 낳은 최고의 여성 시인이자 예술가였다. 그녀는 시대를 잘못 만나 재능을 마음껏 피워보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는 조선이 아니라 중국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 중국에서 가장 큰 중국 국가 도서관에 소장된 《조선시선》이라는 서책에 허난설헌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선》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시집으로서 신라의 최치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뛰어넘는 재능을 가졌던 인물들의 시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이다. 또한, 중국의 최고 명문 대학인 베이징대학의 조선어학과에서는 한국사가 정규과목인데, 한 학기의 강의주제가 ‘허난설헌의 시’일 정도로 중국 학생들은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중국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허난설헌에 대해 그리 관심이 높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아마도 남성중심의 유교사회의 높은 남존여비의 벽이 여성들의 재주가 내놓고 높이 평가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563년 강릉에서 태어난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듣고 자랐다. 널리 불리는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고 본명은 초희(楚姬),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이고, 자는 경번(景樊)이었다.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당시 여성이 이름 · 호 · 자를 고루 갖춘 경우가 드물었는데 그녀의 경우는 달랐다. 바로 여성으로서 대우를 그만큼 받았다는 뜻이다. 가족 모두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허씨 집안의 가장(家長) 허엽은 글을 가르치면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허난설헌은 뛰어난 학자였던 아버지 허엽으로부터 글을 배우면서 본디 가지고 있던 천재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위로 오빠 허성(許筬), 허봉(許)을 두었다. 두 오빠도 중요한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고, 동생 허균도 어릴 적부터 뛰어난 문사의 기질을 보여 촉망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허씨 집안을 모두 부러워했고 3허(三許)니 4허(四許)니 일컬으며 형제 시인으로 손꼽았다. 선조 때의 유명한 의관인 어의 허준이 그의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다.
이런 명문가였기에 당시 많은 시인들이 이들 집안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그 중에서도 당시 3당(三唐) 시인으로 일컬어지던 미천한 출신인 최경창, 백광훈, 이달 등과 유난히 친분이 두터웠다. 허성, 허봉 등은 이들 불우한 시인들을 남달리 알아주고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허성, 허봉과 터울이 지는 허난설헌과 허균은 어릴 적부터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지금 남산 밑 마른내길(乾川洞)에 살았던 이 어린 남매는 이달에게서 매일 시 수업을 받으며 천재성을 발휘했다.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