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화파 최명길 1편
■ 주화파 최명길 1편
병자호란은 우리나라 2대 전란에 속한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전쟁을 치른데 비해 병자호란은 불과 40여 일이었지만 그 피해는 임진왜란과 맞먹을 정도였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에는 항복한 일이 없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군신(君臣)의 맹약을 맺는 치욕적인 항복이 있었다. 호란을 겪으며 이를 수습한 최명길(崔鳴吉:1586~1647)을 우리는 주화파(主和派)라고 부른다.
최명길의 아버지 최기남(崔起南)은 서인에 속한다. 최기남은 때로 정치 일선에 나서기도 했지만 정계의 중심인물은 아니었다. 최기남은 영흥부사라는 한직(閑職)을 맡기도 하는 등 가난하고 지혜가 변변치 못한 벼슬아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탓으로 그의 집안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최명길은 최기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후광은 별로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서인 노장들을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7세 때 임진왜란을 겪었지만 남달리 총명한 그는 이 난리 중에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그는 당대의 석학이자 대정치가인 오성 이항복과 상촌 신흠에게 본격적으로 학문을 익혔다. 그는 20세의 약관으로 초시에 합격한 뒤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정계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선조 말년부터 서인들은 정계에서 소외되었고, 광해군 연간에는 대북파가 득세해 서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때 최명길의 아버지는 대북파의 정책에 맞서다가 끝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가평 농장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청년 최명길도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했다고 하여 조정에서 쫓겨났다. 20대 후반의 최명길은 장유·이시백 같은 벗들과 어울려 산방(山房)이나 절간을 찾아다니며 시문을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특히 그는 장유와 함께 당시 이단으로 치던 양명학(陽明學)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래의 명분을 중시하는 주자학보다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양명학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의 정치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어 그의 정치적 판단에 큰 기준이 되었다.
친구 이시백의 아버지이자 그의 아버지와 친구가 되는 이귀는 광해군을 몰아내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서인들은 새로운 결속을 다지고 정권을 잡기 위해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을 성공시켜 정권을 잡았다. 소장세력인 최명길도 반정에 협조한 공로로 완성군(完城君)이라는 공신 봉호를 받았다. 그는 반정을 계기로 다시 조정에 나와 인사권을 쥔 이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단숨에 이조좌랑에서 이조참판까지 올라 세력을 얻었고, 반정 다음 해인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장인인 도원수 장만을 도와 큰 공을 세움으로써 그는 정계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최명길은 대동법 시행, 양전(量田) 추진, 부세와 군제 개혁, 서자들의 관계 진출 등의 일에 앞장섰고, 크고 작은 정책도 조정에 건의했다. 특히 반정 뒤에도 공(功)을 놓고 서인들이 또다시 분열하여 당쟁이 일어나자, 최명길은 양쪽의 조정에 힘썼다. 그가 이때 주장한 것이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이다. 둘 다 옳은 점이 있고 둘 다 그른 점이 있으므로 이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