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금요일

사육신死六臣 1편

■ 사육신死六臣 1편

■ 사육신(死六臣) 1편

조선시대 제4대 국왕인 세종은 정도전의 재상중심정치와 태종의 왕권중심정치를 잘 절충하면서도 유교적 이상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연구기관으로 집현전을 설치·운영하였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 정치는 강력한 군주에 의한 정치가 아니고 유학의 소양을 갖춘 사대부가 정치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종이 국왕과 신하의 상호 협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운영을 원했지만 현실은 자연히 신하가 중심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특히 세종 말년에 국왕이 병환으로 정치참여가 어려워지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은 원래 목적인 유학연구나 국왕의 정책보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국가 정책에 깊이 간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집현전의 성격은 점차 학문연구기관에서 정치기관으로 변화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450년 세종이 죽자 집현전은 정치적 활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집현전 학자들의 관직 진출은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죽고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문종은 단종이 나이가 어려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으므로 황보인이나 김종서 등의 신하들에게 어린 왕을 보필하도록 신신당부했다. 이에 따라 재상의 합의체인 의정부는 국왕을 보필하고, 국왕과 정사를 의논하는 최고정치기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정치의 중심기구로 변했다. 하지만, 이는 유교에서 말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운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소수의 재상에 의해 정치가 독점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는 집현전의 젊은 유학자들에게도 불만을 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세종의 왕자 중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중앙정치에 불만을 품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 시기에 중앙정치는 소수의 재상과 집현전 유학자, 그리고 왕실세력의 세 흐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수양대군은 왕위에 야심을 품고 정인지·신숙주·한명회(韓明澮) 등을 측근으로 삼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자신과 경쟁자인 안평대군을 강화로 유배보냈다가 사사(賜死)시켰다. 이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그리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김종서와 뜻을 같이하는 이징옥을 파면하고, 이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이징옥의 난도 진압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 2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