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종과 하륜 1편
■ 태종과 하륜 1편
하륜은 고려 말 개혁파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보수파의 수장인 이인임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개혁·보수 양대 세력과 동시에 어울리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고려왕조 하에서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왕조 창업에는 반대했다.
"1392년에 조선이 세워지자 하륜은 정치무대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 멸망 직전에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과 맺어둔 인연이 유리하게 작용한 덕분에, 그는 조선 건국 이듬해 정치무대에 복귀하여 이방원의 참모로 활약하게 된다. 관상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고려 멸망 직전에 열아홉 살 연하의 이방원에게 코와 이마에서 제왕의 기운이 흐른다 는 점을 확신시켜준 적이 있었다. 이것이 이방원과의 인연을 만드는 발판이 되었다.
",정계에 복귀한 하륜은 1398년에 이방원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그때부터 1416년에 사망할 때까지 하륜은 태종 정권 하에서 영의정을 네 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부귀영화와 권력을 양 손에 쥐고 있었다. 숱한 부정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면서도 끝끝내 신변과 명예를 지킨 점으로 볼 때 그가 태종과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륜이 이방원의 신임을 얻은 비결은 무엇일까?
하륜은 사전에 주군의 의중을 확인한 뒤에 그에 맞는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건국 직후까지 도평의사사란 기구가 있었다. 신하들이 모여 국가의 최고정책을 결정하는 이 기구는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정종 때 하륜은 정부조직 개편을 지휘했다. 이때 그는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바꾸면서, 도평의사사가 갖고 있던 군사권을 의정부에 부여하지 않았다. 왕권을 견제하는 최고정책결정 기구의 힘을 약화시킨 이 같은 조치는 곧이어 등장할 태종 정권이 신하들의 간섭을 덜 받으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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