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4일 일요일

공민왕과 신돈 1편

■공민왕과 신돈 1편

■공민왕과 신돈 1편

공민왕이 추진한 초기의 개혁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공민왕은 재상들과 뜻이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방해 세력으로 여기게 되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신돈의 등용을 단지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이루어진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공민왕은 직접 “스승과 나는 사생을 같이할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맹세한다” 는 글을 썼다.

신돈은 먼저 개각을 단행해 높은 벼슬아치들을 유배 보내거나 좌천시키고, 실권을 쥐고 있던 최영을 잡아다가 신문했다. 그리고 새 인물을 등용했다. 그의 행동은 신속했고 인사개편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돈은 집권한 지 석 달 만에 공민왕이 늘 불안하게 여기던 대신들을 거의 파면 축출하고, 문생(門生)의 파벌도 없애 버렸다. 또한 무장을 대표하는 최영마저 조정에서 쫓아내 버렸다.

신돈은 김부식보다도 긴 ‘51자’의 직함을 받았는데, 대략 “공신으로서 행정의 총책임을 맡으며 관리의 비리를 적발하는 감찰 업무와 승려에 관련된 일, 그리고 천문과 기상(氣象)과 복서(卜筮)를 보는 책임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그는 개인 저택을 갖지 않고 남의 집에 머물렀고, 조정에 나올 때 관복을 입고 머리를 길렀기에 사람들은 그를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불렀다.

1366년 신돈은 조정에 나온 지 6개월 뒤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설치하고 불법으로 점거된 토지와, 농장에 불법으로 소속된 노비, 부역을 도피한 양민을 찾아내 정리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 바람에 전국이 떠들썩했다. 농장주들은 벌벌 떨면서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살폈고, 토지를 빼앗겼던 중소 지주들은 자기 것을 되찾겠다는 희망에 차 있었다. 농장에 투입된 노비들은 자유민이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신돈의 인기는 치솟았다. 불법으로 신분이 추락된 천민과 노비들이 신돈을 직접 찾아와 양인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신돈은 이들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었다. 강제로 노비가 된 이들 외에 본래 노비였던 사람들도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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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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