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松江 정철 1편
■ 송강(松江) 정철 1편
광주 무등산 자락에는 조선 중엽 권력 다툼의 와중에 물러난 선비들이 세운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면앙정 등 수많은 정자와 원림(園林)이 남아있다. 특히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의 식영정(息影亭)은 기대승, 송순, 김덕령, 송익필, 김성원, 고경명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 묵객(墨客: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의병장들이 스쳐 지나간 장소이다. 오늘날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정철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곡 많은 인생사를 겪으며 수많은 시조와 가사를 남겼다. 그가 남긴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고,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을 남겨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정철은 탁월한 비유법과 파격적인 언어 구사, 호탕하고도 원숙한 시풍으로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들로 우리나라 시조와 가사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4편의 가사는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김만중은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을 두고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이 세 편뿐이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정철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신흠은 그에 대해 “정철은 평소 지닌 품격이 소탈하고 대범하며, 타고난 성품이 맑고 밝다.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동인(東人)의 한 분파인 북인 측에서 주도하여 편찬한 《선조실록》에는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은 거의 문인으로 언급되지만, 선조 중기 당시에는 조선 정치사에 가장 잔혹한 피바람을 불러왔던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정적(政敵)들에게 자비없는 잔혹하고 비열한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물론 기축옥사는 무엇보다도 선조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지만, 실제로 앞장서서 이를 진행한 것이 정철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에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더구나 《관동별곡》이나 실록에 기록된 심각한 직무유기와 무능력 때문에, 잔혹함과는 별개로 관료로서의 평가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만약, 관료가 아니라 서경덕이나 김삿갓처럼 일반 선비였다면 후대에 예술가로 칭송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사 작품 4개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은 현존(現存) 중인 당대의 흔치 않은 언문(諺文) 고전 문학 작품이다. 이 네 작품은 문학성과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여전히 실리고 있고, 수능문제로도 자주 출제되고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