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항복 1편
■ 조선 총독 아베\xa0노부유키의 항복 1편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3년\xa011월\xa022일부터 11월 26일까지 피라미드가 바라다 보이는 이집트 카이로의 메나하우스(Mena House)호텔에서 연합국 대표인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국방최고위원장,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제1차 카이로회담을 가졌다. 11월 23일 저녁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 관저인 커크빌라(Kirk villa)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장제스 중국 국방최고위원장이 먼저 만나서 카이로 회담 선언의 초안을 만들었고, 11월 25일 미·중·영 3국 대표는 일본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협력하고 일본의 영토문제를 합의한 후에 다음과 같이 공식성명을 발표하였다.
1) 미국, 영국, 중국 3국은 일본에 대해 압력을 가한다.
2) 미국, 영국, 중국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응징하지만 영토 확장의 의사는 없다.
3)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얻은 태평양제도를 박탈하고, 만주와 타이완 등은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의 무력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을 몰아낸다.
4) 한국이 노예상태에 놓여있음을 유의하고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
이렇게 카이로회담에서 연합국 3국은 한반도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기로 하였으나, 구체적인 방안은 결정하지 않은 상태로 회담을 끝마쳤다. 그 후 1945년 8월 10일부터 미국, 영국, 소련 3국이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주\xa0포츠담에 있는 독일 왕실의 여름 별장인 상수시(Sanssouci)궁전에 다시 모여 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미국이 원자폭탄을 완성하여 8월 6일\xa0일본 본토인 히로시마시와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투하하게 된다. 그리고 그날 미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할\xa0것을 요구하였고, 8월\xa010일 일본은 내각회의를 열고 무조건 항복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포츠담 회담을 하던 연합국은 1945년 8월 11일 한반도에 38선을 설정하고 38도선 이남은 미국이, 38도선 이북은 소련이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항복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 운명의 38선은 미·소 양국이 책상위에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반(半)이 되는 지역을 선을 그으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한 마을이 또는 한 집이 남북으로 나뉘기도 하는 얄궂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였다. 매우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그동안의 목숨을 건 독립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앞날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