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종 1편
■ 효종 1편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 일가족이 참화를 당하고,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1649년 31세의 나이로 조선의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17대 효종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볼모생활 차이는 이후 그들의 운명을 결정 짓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에서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서양의 역서 및 과학서적들을 선물로 받으면서 서양의 과학 문명을 접하고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아직 초보 단계에 있음도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 문물들을 접하게 되었지만, 소현세자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에 더 전념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이 같은 경험들은 봉림대군의 반청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한 것은 반청감정 때문이었다. 원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친명사대(親明事大)주의였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대사상은 병자호란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왕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하는 치욕까지 겪게 되었으며,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외교노선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인조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하였고,
인조는 이 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간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자갈등으로 귀국 후 갑작스러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독살설’로 그 의문이 증폭되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첫 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후 소현세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에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고, 마지막 셋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했다. 이렇게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린 인조의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고 하는 의문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