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명의 이순신 1편
■ 2명의 이순신 1편
난중일기 속에 이런 대목이 있다. 『1592년 1월 10일. 비가 내내 내렸다. 방답(防踏)의 신임 첨사(僉使) 이순신이 들어왔다.』 방답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관할하던 전라좌수영의 5관(官:순천·광양·보성·흥양·낙안)·5포(浦:방답·사도·발포·녹도·여도) 가운데 5포의 한 곳으로, 새로 부임한 방답의 신임 첨사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는 내용이다. 첨사는 고위직인 종3품으로 정식명칭은 첨절제사다. 육군에는 병마첨절제사, 수군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있는데, 정3품이었던 수사 바로 밑의 계급이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인데, 방답 첨사도 이순신이라니.........
전라좌수사도 이순신이고, 그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찾아온 방답의 신임 첨사의 이름도 이순신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발음은 같지만 한문 이름은 다르다. 즉 전라좌수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고, 방답의 신임 첨사는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이다. 무의공 이순신은 훗날 원균이 이순신을 비판할 때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라고 했는데, 그 다섯 아들이라고 평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섯 아들은 바로 이순신과 동고동락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긴밀했던 사람들로서, 순천 부사 권준, 녹도 만호 정운, 흥양 현감 배흥립, 광양 군수 어영담, 그리고 방답 첨사 무의공 이순신이 그들이다.
무의공 이순신은 이순신보다는 9살 아래인 1554년생이다.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즉 조선 왕실의 후예이다. 자(字)는 입부(立夫)이고, 시호는 무의(武毅)다. 그래서 무의공이라고 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학에 힘썼으며 지혜가 뛰어났다. 장성하면서 준엄하고 단정한 인품으로 지조가 굳었다고 한다. 어려서는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32살의 충무공 이순신이 1576년 정기시험인 식년시에서 급제했는데, 무의공은 그 이듬해인 1577년에 23살의 나이에 특별시험인 무과 별시에서 급제했다. 활쏘기 대회에서 장원한 상으로 북방 방위에 차출되는 것을 면제받았다. 빠른 출세에 시기한 무리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1580년(선조 13년)에 탄핵을 받고 선전관(宣傳官)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해 겨울 다시 복관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82년 4월에는 강진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강진의 지역 호족(豪族)들과 마찰을 빚어 1585년(선조 18년)에 또 파직 당하였다. 그 뒤 특별 별명(別命)을 받아 선전관에 복직되어 어전(御殿)을 호위하다 옛 스승인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1586년(선조 19년) 함경도 온성부 판관이 되었다. 1588년(선조 21년)에는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발탁되어 명나라 사신 수행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 사절단이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자, 명나라 사절단이 본국에 귀국하여 이 문제를 트집잡았고, 이로 인해 탄핵당하여 파직됐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