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으로 산다는 것 2편
■ 왕으로 산다는 것 2편
조선시대 왕이 내리는 여러 가지 행정처분은 왕의 행정권에 속한다. 기존 행정조직의 통폐합, 새로운 기구의 설치, 행정구역 변경, 세금 증감, 관료 증감(增減) 등의 행정조치가 이에 해당된다. 왕이 정사(政事)를 결정할 때는 의정부(議政府) 중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비변사회의로 바뀌었다.
비변사에서는 의정부 대신과 6조의 판서 그리고 삼사(三司) 관료들이 합좌(合坐)하여 정사를 논의하고 인사를 결정하였다. 조선시대는 전국에 걸쳐 국가행정조직이 정비되었는데, 최 말단(末端)에 존재하는 각각의 호(戶)로부터 면(面)·군(郡)·도(道) 그리고 중앙정부에 이르기까지 중앙집권적인 행정망이 형성되었다.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각종 민원이나 비상사태는 이 행정망을 통해 왕에게 보고되는 시스템이 갖추어 진 것이다.
군대를 동원하거나 전쟁을 선포하는 등의 권한도 물론 왕에게 있었다. 왕은 군통수권자일 뿐만 아니라 군사 동원, 군역 자원 징발 등을 가진다. 조선은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16세에서 60세 사이의 일반 농민들이 군역(軍役)으로 군사력에 편성되었고, 왕은 상황에 따라 이들의 군역을 면제하거나 연기해 줄 수도 있었다. 병조판서나 각도 관찰사. 절도사. 방어사 등 군권을 겸임하는 관료와 조선후기의 어영청. 금위영 등 5군영 장수들도 왕이 임명하거나 파면하였다.
또한, 왕은 국가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와의 외교(外交)를 수행했다. 조선시대의 외교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정책과 일본이나 여진을 상대하는 교린(交隣)정책을 추구했다. 매년 정기적으로 중국에 네 차례 사신을 보내고 예물로서 조공을 바쳤다. 정월 초하루의 정조사(正朝使), 동지축하의 동지사(冬至使), 중국 황제 생일 때 성절사(聖節使), 중국황태자 생일의 (千秋使)가 정기사신이었다.
그밖에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일본 등의 첩보가 있을 때 진주사(進奏使)를 보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낸 후 왕은 망궐례(望闕禮:‘궐’자가 적힌 나무패에 절함)를 하면서 중국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도 왕이 직접 교외(校外)에 나가 영접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접대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외교관계만 유지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왕은 행정권·입법권·사법권 등 세속적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절대 권력자였다. 그러나 왕이 전횡(專橫)을 일삼는 폭군이 되는 길은 막아야 한다. 우선 조선시대의 왕은 유교이념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유교이념을 파괴한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반정군에 의해 축출을 당한 예(例)가 있다.
당연히 전제적(專制的) 왕의 출현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현실적 요소들이 존재하였고, 양반 관료들도 유교교리를 내세워 왕의 전횡을 제약(制約)했다. 결국 조선시대의 왕은 유교교리에 입각하여 이를 솔선수범해야 하고, 양반 관료들을 통제하면서도 이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정치적 기량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하여 중앙 집권적인 양반관료제가 실현되어 왕의 명령은 잘 짜여진 행정조직을 통하여 지방 구석까지 전달되고 이행되는 것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