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9일 화요일

소현세자 2편

■ 소현세자 2편

■ 소현세자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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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손인 이회를 낳은 해인 1636년 12월에 청(淸)이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12만 명의 군사를 일으킨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쇼현세자와 세자빈의 인생길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빈 강씨는 시동생들인 봉림대군, 임해대군 및 왕실 가족과 함께 낳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원손을 안고 강화도로 피신을 갔다가 청에 붙들린 몸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군량미가 떨어져 45일 만에 청나라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치욕을 당한 끝에 청과 굴욕적인 항복 조약을 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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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637년 2월, 청과 맺은 정축화약의 항복 조건에 따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둘째아들 봉림대군과 삼공육경(三公六卿:삼정승 육판서)의 자제들, 그리고 주전론을 주장했던 김상헌, 윤집, 오달제, 홍익한과 백성들 20여 만 명이 함께 인질이 되어 청의 수도인 심양(瀋陽)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등의 심양에서의 생활상은 세자시강원(侍講院) 신하들이 본국으로 보고한 《심양장계》등을 통해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세자 일행이 심양(瀋陽)으로 길을 가던 중 청(淸)은 청의 여성들은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을 타니 세자빈 강씨도 말을 타고 심양관까지 올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조선 아녀자들이 그렇듯이 세자빈 강씨는 한 번도 말을 타 본적이 없었다.

세자빈 강씨는 대가 센 여인이었다. 모두가 걱정했지만 세자빈 강씨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말에 올라타 조선의 빈궁(嬪宮)으로서의 자존심을 당당히 보여주었다. 그렇게 심양관에 들어서니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 두 채만 덩그러니 있었다. 척박한 기후로 인해 소현세자는 시시때때로 병이 나서 세자빈은 물론 시종들의 근심이 깊었다.

그러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영민하고 지혜로웠으며, 용기와 기백이 있어 청나라 황제나 고관들의 비위를 그런대로 맞춰가면서 인질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조선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므로, 청과 조선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중간 역할을 해낸 것 같다.

심양에서의 8년간의 생활은 세자와 세자빈의 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청나라를 과거의 야만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치·문화의 강국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국제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간 것이다. 세자와 세자빈은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과 조선 사이에서 정치적 조정(調整)을 맡았으므로,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소현세자를 통해서 해결하려 했다.

소현세자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는 한편, 당시 청에 들어와 있던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게 되었다. 아담샬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와 각종 근대기기들은 온통 신기하고 놀라운 것 들 뿐이었다. 소현세자는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 청국조차 서구의 뛰어난 과학과 기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의 머릿속 에는 이 놀라운 문명의 기기를 하루라도 빨리 조선으로 가져가서, 조선을 청국 못지않은 근대 국가로 발전시킬 생각 뿐 이었다. 반면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던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은 서구 문물을 접하면서도 그리 큰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야만족이라 멸시하였던 여진족에게 볼모로 잡혀온 처지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