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4일 일요일

군함도軍艦島 2편

■ 군함도軍艦島 2편

■ 군함도(軍艦島)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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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는 많은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곳 중 하나이다. 축구장 2개 만한 크기의 섬전체가 탄광이며, 갱도는 해저 1000m(1km)에 이르는 해저탄광이다. 하시마에서 석탄이 발견되고 채광이 시작된 시기는 대략 18세기 말~19세기 초였다. 당시엔 그곳에 살던 어민들이 소규모 석탄을 캐면서 부업으로 일삼은 정도였다. 이곳에 석탄이 묻혀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미쓰비시라는 기업이 섬을 소유하면서부터였다. 미쓰비시를 일약 일본의 거대 재벌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90년 하시마탄광의 원래 소유자가 미쓰비시에 10만엔을 받고 섬 전체를 양도했고, 이때부터 미쓰비시가 본격적으로 바다 밑에 묻혀 있는 석탄을 캐내기 시작했다. 미쓰비시에 의해 갱도가 속속 완성되면서 엄청난 양의 석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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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고, 학교가 세워지는 등 기본적인 거주 환경이 갖추어졌다. 1916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가 세워졌고, 그 뒤로도 고층 건물들이 속속 지어졌다. 이러한 근대식 아파트 건설은 일본이 하시마를 산업화와 근대화의 상징 이라고 주장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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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에는 약 41만t의 석탄이 출탄되면서 개발의 최정점을 찍었고, 1960년쯤엔 이 작디작은 섬에 4,267명이 살았다고 한다. 이는 당시 도쿄 특별구 인구 밀집도의 9배를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탄광 시설, 주택, 초중학교, 점포, 병원, 사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섬 안은 완벽한 도시 기능을 구비했다. 특히 미쓰비시는 해저 탄광을 개발하기 위해 모든 최신 기술을 이 섬에 쏟아 부었는데, 당시 도쿄대 우등생들은 모두 하시마로 모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1960년 이후 석유가 등장하면서 하시마 탄광은 점점 쇠퇴하게 되고, 1974년 1월엔 완전히 탄광 문을 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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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석탄이라는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중요한 산업 자원이었지만,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수많은 한국인이 강제징용을 당한 곳이어서 한국인들에게는 지옥섬이나 감옥섬으로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곳이다. 하시마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17년이다. 개발사인 미쓰비시는 탄광노동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각지는 물론 조선인도 모집했다. 1918년 하시마에서 941명이 갱내부에서 광부로 일했고, 이중 70명(7.4%)이 조선인이었다. 1935년 3월26일 하시마 탄광의 갱내 가스 폭발로 2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큰 사고가 발생했다. 출신지가 공개된 사망자 17명 중 조선인 노동자는 절반이 넘는 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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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총동원체제를 가동하면서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의 수도 해마다 늘어, 패전 직전인 1944년에는 800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비인간적 환경에서 고통을 겪었으며, 외부와도 철저히 격리된 채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