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류시인 이옥봉 2편
■ 여류시인 이옥봉 2편
운강 조원은 남명(南冥) 조식(趙植)의 문인으로 1564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1575년 정언이 되었으며, 이조좌랑, 삼척부사를 거쳐 1593년 승지에 이르렀다. 조원(趙瑗)의 첩으로 들어간 옥봉은 한양으로 올라왔고, 이후 다른 소실들과 서신으로 예술적 교류를 나누거나 장안에 내노라하는 문객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옥봉은 운강 조원이 괴산군수, 삼척부사 등 외직에 나갈 때 동행했으며, 운강은 옥봉의 글재주를 인정하여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도 글을 짓게 하였다. 옥봉은 당대 문인들에게도 시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조원의 친구 윤국형(尹國馨) 또한 지사(智士)의 기개가 엿보이는 그녀의 시에 감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옥봉 또한 자신의 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妙譽皆童稚(묘예개동치)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
東方母子名(동방모자명) 동방에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
驚風君筆落(경풍군필락)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라고
泣鬼我詩成(읍귀아시성)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네』
이 시는 옥봉이 운강의 정실부인에게서 난 아들에게 보낸 시로, 아들과 자신의 문재(文才)에 대한 자긍심을 표출하고 있다. 운강에게는 희정(希正), 희철(希哲), 희일(希逸), 희진(希進)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시가 누구에게 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먼저 아들이 쓴 글씨의 위력을 칭찬한 뒤, 뒤이어 자신의 글 솜씨 역시 뛰어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10여년 후, 이웃집 여인이 남편인 산지기가 억울하게 소도둑으로 누명을 쓰고 붙잡혀 가자, 절필 약속을 깨고 파주 목사에게 시 한 수를 지어 탄원서를 보냈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네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닌데
郞豈是牽牛(랑기시견우) 임이 어찌 견우이리오
이 시는 칠석날 설화의 주인공인 견우와 직녀에 빗대, 아내가 직녀가 아니듯 남편도 견우가 아닌데 어찌 소를 끌고 갔겠느냐는 재치 있는 내용이었다. 시를 받아 든 형조의 당상관은 뛰어난 글 솜씨에 감탄해 사내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