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2편
■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2편
1919년 4월 15일(화요일) 오후,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도착하여, 강연이 있다고 속여 마을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일본군은 돌연 출입문과 창문을 굳게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마구 학살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는데 불길이 5시간쯤 타올랐다. 그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밖으로 내던지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은 그 아이마저 찔러 죽였다. 또 일본군은 불속에서 뛰쳐나오거나 길에 나왔다가 달아나는 사람에 대해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되었고, 일본군이 지른 불로 민가(民家) 31호가 불타버렸다. 그뿐 아니라 일본군은 근처에 있는 고주리로 가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여 40여 명의 주민들이 일본군에게 잔인하게 목숨을 잃었다. 연이어 이웃 마을에 며칠간 계속 사격, 방화, 구타를 자행하였으니, 사상자가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박사가 이틀 뒤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 입구에 묻을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참변을 전해들은 미국 선교사이며 교육자인 언더우드(Underwood, H. H., 元漢慶)와 미국 영사관 직원 일행이 4월 16일 서울을 출발하여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생존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이 겁에 질린 채 언덕에 모여 있었고, 살해된 시체와 불탄 집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더우드는 현장에 모여 있는 생존자 일부를 만나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듣고 참상을 확인하였다. 한편 4월 17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며 선교사인 영국인 스코필드(Schofield, F. W.)가 현장으로 달려가, 생생한 참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수원에서의 잔악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또 영국영사 로이드 등도 학살 현장에 가서 사건 진상을 조사하였다. 또한 침묵을 지켜오던 일본 내의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 와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도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이며,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또 일본기독교동맹은 뒤늦게나마 대표를 보내 참상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만행의 일단을 신문과 잡지에 실어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한편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 지휘책임자인 보병 제79연대소속 아리타 중위에 대한 처벌은 직무 집행상 온당한 행위였다는 이유로 덮어두려고 하였으나,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자 7월 17일자로 군법회의에 붙여졌다. 그러나 아리타 중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82년 9월 29일에는 정부와 경기도가 함께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제암리교회는 현재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어 보존 중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