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신 이이첨 2편
■ 간신 이이첨 2편
1593년 3월, 이이첨이 세조의 영정을 들고 행재소(行在所)를 찾아오자, 선조는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왔다. 당시 조선의 역대 국왕의 영정이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집경전 참봉 홍여율이 태조의 영정을 보전했고, 광릉 참봉 이이첨이 세조의 영정을 지켜냈던 것이다. 그때까지 이극돈(무오사화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사림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됨)의 후예라 하여 사대부들로 부터 외면당하던 이이첨은 이렇게 선조의 신임을 받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선조 15년에 소과에 급제하고, 전란이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15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함으로써 벼슬을 제수(除授:추천이 아닌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 받고, 사가독서(賜暇讀書:유망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공부하게 함)의 혜택을 받았다. 가문의 흠결은 이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597년(선조 30년) 6월 22일의 실록에는 그의 효행에 대한 경기 관찰사 홍이상의 보고 내용이 실려 있다. 전 평강 현감 이이첨이 임오년과 계미년 사이에 아버지와 계조모가 잇달아 세상을 뜨자,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였으며, 상제(喪祭)의 의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거했고 상복을 벗은 후에도 삭망(朔望)에 성묘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극한 효행을 인정받아 고향에 정문(旌門:충신 열녀 등의 문 앞에 세워진 붉은 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전쟁이 사실상 종식된 1598년(선조 30년)에 이이첨은 또 하나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정6품 병조 좌랑이었던 그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 사서로 임명된 것이다. 이때부터 임진왜란 때의 맹활약으로 일찌감치 차기 왕권을 예약해 놓은 광해군과의 깊은 인연이 맺어졌다. 이이첨은 세자 광해군에게 충성하면서 내일의 군주를 지켜내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 와중에도 일관된 선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99년에는 이조 정랑에 이르렀고, 1608년에는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기도 했다.
선조는 만년(晩年)에 인목왕후 김씨로부터 딸 정명공주에 이어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을 얻었다. 그로 인해 후계에 대한 선조의 의중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영의정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면서 세자 광해군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북인 일파는 당시 내부에서 일어난 후계자 문제 때문에 대북파와 소북파로 분열되었다. 이이첨은 대북파를 이끌던 스승 정인홍과 함께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을 탄핵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광해군을 지지했다. 이에 분개한 선조가 이이첨에게 원배(遠配:면곳으로 귀양보냄)령을 내렸지만,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은 예조판서에 올랐다. 당시 선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