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 토요일

몽유도원도는 외출 중? 2편

■ 몽유도원도는 외출 중? 2편

■ 몽유도원도는 외출 중(?) 2편

그림이 완성되자 안평대군은 학자들을 불러 함께 작품을 감상했다. 그리고는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한 안평대군이 표제(標題)를 쓰고, 당시 내로라하는 문인 20여 명이 시를 적었다. 이것은 그림과 함께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서예사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몽유도원도」의 그림과 거기에 곁들여진 시와 글씨가 함께 어우러져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 세종대 문화예술의 성과가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이후의 한국 산수화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의 줄거리가 일반적인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현실세계와 중간의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가는 동굴과 험난한 길, 그리고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따로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에 펼쳐진 무릉도원에는 복사꽃이 만발한 복숭아나무와 대나무 숲 사이로 초가집이 보이고 물가에는 작은 빈 배가 매여 있는데, 이 도원세계는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구도)을 구사하였다. 그래서 언뜻 보면 분리된 듯한 다양한 산세와 계곡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매우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룬다. 게다가 화려한 색을 쓰지 않고도 도원의 아름다움을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안견은 산수·인물·화조·매죽 등 다방면에 두루 능한, 조선 전반에 가장 영향력이 큰 거장이었다. 안견의 생몰연대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안평대군과 엇비슷한 연배로 보아 기존에는 1410년 즈음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최근에 1390년대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는 설이 제시되었으며, 세종대의 활약이 두드러지지만 세조 때까지도 활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대가로 성장하기까지는 당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동진(東晋)에서 당·송·원에 이르기까지의 30명이 넘는 중국 역대(歷代) 화가들의 명화(名畫)가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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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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