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6일 토요일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2편

■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2편

■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2편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와 강원도에 왕자를 파견한 이유는 파천 길에 오른 선조의 1차 목적지인 개성이나 평양이 있는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왕자들이 앞장서 근왕병을 모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함경도와 강원도는 태조 이성계가 태어나 활약하던 곳으로 조선 왕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최정예 병력으로 손꼽히는 6진의 기마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4월 30일 새벽, 임해군은 창덕궁을 떠나 함경도로 향했다. 조금 앞서서 순화군도 강원도로 갔다. 5월 3일 강원도 금화에 도착한 임해군은 그곳에서 왜적이 이미 춘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화와 춘천은 하루 일정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임해군은 즉시 북으로 길을 재촉해 5일에는 철령을 넘어 함경도의 안변에 도착했고, 이어 9일에는 원산 주변에 있는 덕원에 도착했다.

임해군은 그곳으로 함경도 감사와 군사령관들을 소집했다. 이에 호응해 북청에 주둔하던 남병사 이혼이 4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왔다. 이 병력이 당시 조선 관군 중에서는 최정예 병력이었다. 임해군은 그중에서 200명을 선발해 선조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전쟁터로 가게 했다.

이 외에도 임해군은 함경도 주민들의 항전 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말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세금을 대폭 감면해 주었다.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 활동은 몇몇 부작용(강제적 물자 수탈이나 불법적 노동력 징발)을 야기하긴 했지만 현실적인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5월 27일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평양의 선조는 물론 덕원의 임해군 역시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할 각오를 하고 의주로 갔고, 임해군은 마천령을 넘어 함경북도의 경성으로 퇴각했다. 그 당시 순화군은 임해군과 함께 있었다. 임진강을 건넌 왜적은 황해도 평산에 이르러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로 각각 길을 나눠 북진했다.

함경도로 쳐들어간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당시 우리 관군은 왜적의 침입로를 철령으로 예상하고 강원도 회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가토 기요마사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함경도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가토는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진출한 뒤 북청, 단천을 지나 계속 북진하면서 왕자들을 추격했다.

6월 11일 선조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자, 함경도에는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경성에서 회령으로 퇴각했다가 7월 23일 회령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임해군과 순화군의 회령 도피 소식이 전해지자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대신을 잡아 적에게 항복한 것이다. 함경도 사람들은 선조에 이어 왕자들 역시 명나라로 망명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