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황의 결혼생활 2편
■ 이황의 결혼생활 2편
퇴계 이황은 조선의 성리학을 정립시킨 위대한 학자다. 권위적이고 엄격할 것 같지만, 이황은 의외로 개방적이고 인격적이며 인간에 대한 사랑이 많았다. 자기 아내를 소중히 대한 것처럼 이황은 부부관계에도 많은 조언을 했다. 부부사이에 불화로 갈등을 겪는 제자에게 이황은 집 밖에서 있었던 온갖 울분과 괴로움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고 사립문에서 마음을 정화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서라고 조언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본인의 가정사는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퇴계의 결혼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서 시작된다는 믿음이다. 부부생활이야말로 가정을 다스리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부부란 서로 손님 대하듯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황의 맏아들은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다. 퇴계는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 되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 것인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며느리가 기거하는 후원 별당을 돌면서 며느리를 살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는 불이 꺼져 있어야 할 며느리 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모양의 인형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다. 인형은 바로 죽은 아들의 모습이었다. 인형 앞에 놓인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말했다. “여보, 한 잔 하세요.” 그리고는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편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고, 한밤중에 잠을 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그날 밤, 퇴계는 깊은 고민을 했다.
며느리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며,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것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드디어 퇴계는 결단을 한다.
다음날 퇴계는 친구이기도 한 사돈을 불러 자신의 며느리를 본가(本家)로 데리고 가라고 강력히 말했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이 후 퇴계는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다. 몇 년 후 퇴계가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날이 저물어 깨끗한 집을 택해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퇴계가 좋아하는 것 뿐이었다. 더욱이 간까지 퇴계의 입맛에 딱 맞았다.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다. 퇴계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갈 때 신으시라.”며 주었는데, 퇴계의 발에 꼭 맞았다. 바로 퇴계의 며느리가 그 집 주인과 결혼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 이황은 여자들에게 재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법과 윤리를 깨뜨리면서까지 며느리를 개가시켰다.
조선시대 윤리나 가풍보다 사람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퇴계를 향해 선비의 법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며, 윤리를 무시한 사람이라고 비판 했다. 그러나 퇴계는 그런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젊은 며느리의 행복을 지켜주고자 했던 자기의 결정이 옳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