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목요일

세종시대의 그늘 2편

■ 세종시대의 그늘 2편

■ 세종시대의 그늘 2편

세종은 스스로 왕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십 년을 넘게 세자로 있던 양녕대군의 연이은 돌발행동으로 급작스럽게 세자가 되었고, 세자가 된 지 두 달 만에 전혀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조선 역사 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태종이 상왕으로 버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2대 왕 정종도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다. 세자에서 물러났지만 언제든지 왕권을 위협할 세력으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도 건재해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세종대왕이 학문을 좋아하는 성군 이미지가 강해서 만원권 지폐에 있는 초상화처럼 근엄한 학자타입의 인자한 모습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실록에 나오는 세종대왕은 100키로에 육박하는 고도비만이었다. 세종은 고기 없는 밥은 먹지 않을 정도로 육식파였다.

『태종이 죽은 지 6개월이 되던 날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태종의 유교에 따라 세종에게 고기를 먹도록 청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이 평소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던 태종이 자신이 죽은 뒤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게 유교를 내렸던 것이다. 실록에 나온 내용이 이 정도니 세종이 평소 얼마나 고기를 좋아했는지 알만도 하다. 세종은 또 다른 의미의 성(?)군이기도 했다. 부인만 무려 6명이고, 자녀는 18남 4녀를 두었다. 조선 왕들 중에서도 기록적인 숫자이다.

세종은 또한 독서광이었다. 사경밤 1~3시에 일어나 정사를 본 까닭에 여러 병을 달고 살았다. 세종 말년에는 앞을 거의 보기 힘든 시각장애도 가졌다고 전해진다. 세종은 두통과 이질, 풍병, 심지어는 성병인 임질과 각기병, 등창에 당뇨 그리고 시각장애까지 병치레가 잦았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이었다. 아마도 학문을 좋아하고 업무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한 정신적 과로와 운동 부족에 의한 합병증으로 보인다. 세종이 이런 몸 상태 속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18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세종의 속을 꽤나 썩힌다. 특히 여자문제로 상당히 말썽을 많이 피웠다. 세종의 큰아들(후에 문종) 세자빈 봉씨가 문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궁녀와 동침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폐 세자빈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자빈 봉씨는 조선의 제5대 왕 문종의 세자 시절의 두 번 째 부인이자, 세종의 며느리로 나인과 대식(동성애)을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폐출 당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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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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