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5일 금요일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2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2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2편

이이는 1557년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1558년 봄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58세였던 이황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이틀을 함께 지냈다. 이 만남은 조선의 성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온 나라에서 존경하는 58세의 이황선생과 젊은 학자 이이의 만남을 요즈음 기술로 녹화를 했다면 무슨 음식을 먹었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두 선생의 만남을 지켜본 이황의 제자 중에 40세가 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황이 이이를 어찌나 극진히 대했는지 제자들은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데 싶어서 탐탁찮게 생각하였다.

이이가 떠나기 전에 시(詩)를 한수 짓고 떠난다. 나이 많은 이황의 제자가 그 시를 읽어보니 보통 시가 아니었다. 제자가 스승에게 “선생님, 사람은 시원찮아 보이던데 시는 훌륭하고 좋으네요.” 하니 퇴계가 하는 말이 “시가 사람보다 못하지.” 라고 하였다. 이황은 이이의 인품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35세의 나이 차이가 있어도 이이가 가지고 있는 학문과 사상을 존중해 주었다. 함께 시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토론을 벌이면서 이이의 재능에 깊이 감명 받은 이황은 뒷날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이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뒤에 태어난 사람이 두렵다”고 한 공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하였다. 이황(李滉)은 젊은 율곡(栗谷)의 재능을 인정했고, 율곡은 노학자의 학식과 경륜을 존경하여 이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에 대한 토론을 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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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는 남다른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다른 뛰어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스승이 없었다. 그의 학문체계는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낸 독창적인 것으로,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서너 살 무렵부터 말과 글을 배워 1548년(명종 3년) 13세 때 진사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소과 대과에 붙어 벼슬에 나아가기 까지 남들은 한번 붙기도 어려운 과거 시험을 아홉 번에 걸쳐 그것도 수석으로만 합격하였다. 그래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듣게 되었다. 과거공부는 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소양을 기르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사대부의 교양학습이나 학문탐구라고 할 수 있지만, 합격을 위해서는 응시하는 시험 종류에 맞추어 그에 따른 효과적인 공부법을 강구해야 했다. 또한 그 시기의 중요한 사회적 관심이 무엇인지에 따라 과거 시험의 출제 경향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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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 23세 때 치른 별시(別試:국가의 경사를 기념할 때 시행하는 慶科의 종류)에 자연의 변화를 기(氣)의 변화로 설명하면서 임금의 수양을 강조한 ‘천도책(天道策)’은 이이의 사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천문기상의 순행(巡行)과 이변(異變) 등에 대해 논한 이 답안이 화제가 되어 장원급제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문제를 출제한 시험관들은 자신들이 여러 날 고민해서 만든 문제에 대해 젊은 이이가 아주 짧은 시간에 훌륭하게 답을 써 낸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며, 답안 내용이 너무도 뛰어나서 중국에 까지 알려졌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