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요일

시험장은 난장판 2편

■ 시험장은 난장판 2편

■ 시험장은 난장판 2편

과거에 합격한 조선 선비들의 평균 나이는 마흔이었는데, 당시 평균 수명이 마흔이 안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만큼 과거 시험이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과거급제가 이렇듯 어렵다보니 부정행위도 아주 심하게 일어난 것이다. 온갖 부정행위가 공공연하게 성행함으로써 과거시험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과거의 폐단을 시정하라는 건의도 많았으나, 한번 흐려지기 시작한 제도의 결함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와 병행하여 뇌물과 정실(情實:사사로운 정에 이끌림), 문벌의 고하, 당파의 소속에 따라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니,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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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의 부정행위가 심각해지면서 시험장은 난장판이 되기에 이르렀다. 단속이 느슨한 틈을 타서 양반 자제들은 많은 수종(隨從)을 데리고 들어갔다. 수종들은 책을 가진 자, 시험지를 베껴주는 자, 외부와 연락해 시험답안지를 바꿔치기 하는 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정조 24년에 치른 과거는 10만 명 정도가 들어갔는데 답안지는 3만 명만 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이 과거장에 조수 여러 명을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巨擘:학식이 뛰어난 사람), 글씨를 써주는 사수(寫手)가 따라 들어갔다.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 까딱 안 하고 대리시험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먼저 잡고 답안지를 다 쓰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답안지를 대신 내주는 선접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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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먼저 내려고 폭력까지 쓰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수만 장의 답안지를 며칠 안에 다 보기 어려우니 실제로는 답안지 앞부분만 보거나, 앞에 낸 수백 장만 채점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통해 훌륭한 인재를 뽑는다는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일부이기는 했지만 소수 힘 있는 가문의 벼슬 독점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차술(借述) 대술(代述)하는 방법도 있었다. 시험장에 대여섯 명을 데리고 들어가 각기 답안지를 작성하고 그들 속에 제일 잘 쓴 답안지를 골라서 내는 것이다. 이것이 차술(借述)이다. 또 시험장 밖에 글 잘하는 선비를 대기시켜 놓고 종사원을 매수해서 시험 제목을 일러주면 대리 답안을 작성한다. 이 대리답안지를 다시 종사원이 응시생에게 전달하여 제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술(代述)이다. 심지어 응시생이 시험장 안에서 일단 절차를 밟고 난 뒤 시험장을 빠져 나와 집이나 서당에 앉아 답안지를 작성한 뒤 다시 들어와 제출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여러 종사자들을 매수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히 권세 있는 집의 자식들이 써먹던 방법이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