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육상잔의 서막 2편
■ 골육상잔의 서막 2편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를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기도 했는데, 조선 건국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과단성이나 추진력, 야망은 물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의 성향은 오히려 아버지인 태조를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개국공신을 포함한 조선의 여러 신하들은 이방원을 꺼려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아버지인 태조마저도 이방원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한편, 장남이 세자에 책봉되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한다면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가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이방우는 그 사람됨이 세자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방우를 제외한 태조의 아들들 중 가장 임금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야망을 가지고 있는 이방원이야말로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였다.
이에 태조는 1392년 8월 20일, 공신인 배극렴, 정도전, 조준을 불러들여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비밀리에 논의하기 시작했다. 태조의 부름에 달려온 세 공신은 처음에는 나이와 그 공로를 따져 세자를 세울 것을 청했다. 그런데 나이로만 따지면 이방우가 세자가 되어야 하지만 이방우는 술먹기만 좋아하는 인물이라 세자로 책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반대로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하지만 이는 태조가 꺼려하고 있었기에 공신들은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태조는 은근슬쩍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는데, 그는 현(現) 부인인 강씨 소생의 아들 중에서 세자를 책봉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강씨 소생의 아들인 일곱째 이방번은 세자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인물이었으므로, 남은 것은 막내 이방석 밖에 없었다. 한참동안의 격론이 벌어진 끝에 결국 지친 태조는 타협안을 내게 되는데, 강씨의 소생이자 막내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한 것이었다. 이에 태조의 눈치를 보며 장자책봉을 주장하던 공신 배극렴이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태조가 타협안을 제시하고, 배극렴과 정도전까지 동조하고 나서자 이방원의 책봉을 주장하던 조준은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고, 결국 막내아들 이방석이 1392년 8월 20일, 조선의 첫 번째 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방원은 그 누구보다도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게 된다. 이로 인해 왕위를 두고 형제끼리 피를 튀기며 싸우는 골육상잔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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