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요일

무령왕릉 3편

■ 무령왕릉 3편

■ 무령왕릉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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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발굴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지석(誌石)이다. 지석이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板石)이나 도판(陶板)을 말한다. 이 석판을 통해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가 합장(合葬)된 무덤임이 밝혀졌다.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고,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한 후에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백제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서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을 알 수 있었다. 지석 앞면에는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는 무덤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했고, 525년 8월에 왕릉에 모셨으며,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했고,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지 28개월 만에 무덤에 안치된 것이다. 28개월 동안은 능 부근에서 임시로 장사지냈으며, 이것은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던 장례 형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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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입구가 있는 돌로 된 방 형태여서 다른 무덤에 비해서 도굴되기 쉬운 무덤 구조였다. 그런데도 발견될 당시에 그 내용물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큰 화제가 됐었다. 무덤의 입구에는 왕과 왕비의 이름이 새겨진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오수전을 올려놓은 이유는 여행갈 때 여비를 가지고 가는 것처럼 죽은 왕과 왕비가 저승에 갈 때 노잣돈으로 사용하라고 올려놓은 돈이다. 이 돈은 중국 양나라의 돈으로, 이를 통해 백제와 양나라 사이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석 뒤에는 무덤을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인 진묘수가 남쪽을 향해 서 있다. 입구를 지나 무덤의 방안으로 들어서면 관을 올려놓을 수 있는 대 위에 왕과 왕비의 시신을 넣은 나무관이 나란히 두 개 놓여 있다.

세월이 오래되어 썩고 부스러진 나무관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장신구와 부장 유물이 출토됐다. 금관 장식, 금귀고리, 금동 신발, 금팔찌 등과 같은 장신구는 물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과 봉황이 새겨진 환두대도가 출토됐다. 또 왕과 왕비가 편하게 머리와 발을 괼 수 있도록 두침과 족좌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밖에 청동 거울 3면과 동탁 은잔 등도 출토되었다. 두침은 왕비 주검의 머리 부분을 받쳐 놓았던 받침대이고, 족좌는 나무로 만든 발받침 장신구이다. 왕의 다리를 받치는 족좌와 왕비의 머리를 받치는 목침의 경우 왕의 것은 검은 옻칠과 금으로 장식했고, 왕비의 것은 붉은 단청과 금칠을 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배치로 무덤의 입구에서 무덤방을 바라볼 때 왕은 오른쪽이고 왕비는 왼쪽이며, 무덤의 입구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나무 관 조각들에서 일본산 금송(金松)과 삼나무가 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며, 일본에서 목재를 수입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