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대첩 3편
■ 진주대첩 3편
일본이 진주를 주목한 이유는 또 있다. 일본군이 전라도로 가는 길목을 막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경상우도 의병들의 중심지가 진주이고, 또 거창과 김천 그리고 사천과 고성 및 진해 등 경상도 지역에서 일본군이 당한 잇따른 패전에 출현한 조선 육군들이 바로 진주성 병력이니 경상도를 온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주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략하고자 호소카와 타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카츠 등이 이끄는 3만 대군으로 김해성을 출발했다.
이 3만이란 병력은 개전(開戰) 이후 이 시점까지 단일 전투를 위해 동원한 최대의 병력이었다. 그 만큼 일본군이 진주성 공략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고, 반드시 진주성을 점령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진주성에는 경상도의 전쟁준비와 전투를 지휘하는 책임자인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전쟁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을 다스리는 임시직) 관찰사 학봉 김성일선생이 있었고, 진주의 군민을 지휘하는 책임자는 진주 목사(牧使) 김시민장군이 있었다.
전투의 실질적 지휘관인 진주 목사 김시민장군은 1591년 진주판관으로 부임해 왔는데, 당시 조정에서 일본의 낌새가 심상치 않자 능력 있는 무관(武官)들을 차출해서 남쪽 전방(前方)으로 차송(借送:빌려서 보냄)한 케이스였다. 판관(判官:종5품)은 목사를 보좌하며, 군정(軍政)과 민정(民政)의 실무를 담당하고 지휘하는 목(牧)의 2인자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그런데 1592년 4월, 전쟁이 일어나고 진주 목사(牧使) 이경이 지리산으로 피신할 때, 그를 따라 갔다가 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때마침 경상도 초유사로 내려온 학봉 김성일선생이 진주로 와서 김시민을 복귀시켜 진주목사 대리를 맡겼다.
김시민장군은 성을 새로 고쳐 수축하고, 모자란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시켰으며, 전쟁에 대비해서 군량과 물자를 비축하고 무기를 제조하였다. 한편으로, 수시로 진주성의 군사를 이끌고 경상우도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진주 주변 지역, 거창, 사천, 고성, 진해 등의 일본군을 토벌하며 연승하면서 공을 세웠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김시민은 7월에 정식으로 목사(牧使)에 임명되었다.
1592년 9월 말, 일본군은 김해성에 집결해서 진주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왜군은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동북방의 비봉산과 선학산을 가르는 말티고개에 나타났다. 다음 날 진주성을 정찰하며, 진주성을 포위하고 본격적인 공성(攻城) 준비를 했다. 당시 왜군은 대략 3만 명이었고, 진주성 안에는 일시적으로 규합한 병사 3,800명 뿐 이었다. 이 전투에서 왜군과 조선군의 비율은 8대1이었고, 게다가 왜군은 전쟁으로 단련된 정규병인데 비해 진주성 안에는 죽음을 각오한 군민이 지키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어떻게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