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3일 토요일

영조의 어머니 ‘동이’ 3편

■ 영조의 어머니 ‘동이’ 3편

■ 영조의 어머니 ‘동이’ 3편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복순이가 어려운 환경 때문에 용흥사로 와서 살았고, 어느 날 나주목사로 부임하는 일행을 만나 그들을 따라가 살다가 훗날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가 12세의 나이로 궁녀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숙종이 숙빈 최씨를 처음 보고 후궁으로 삼은 것도 인현왕후가 거주했던 궁에서 최씨가 인현왕후의 안녕을 빌고 있는 모습에 반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만큼 숙빈 최씨가 궁녀시절 인현왕후와 관계가 깊은 것만은 틀림없다. 후에 숙빈 최씨가 후궁이 되어서도 철저하게 인현왕후 편에 서고, 또 장희빈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만 봐도 담양에서 내려오는 나주목사부인 민씨부인과의 인연은 사실로 보인다.

어쨌든 숙빈 최씨의 출생에 대한 정식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당시로서도 최하층 출신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양반가 출신이라면 정 1품 빈(嬪)까지 한 후궁의 가문을 안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숙빈 최씨가 궁에 들어와서 하는 행적으로 봐서도 인현왕후와 관계가 아주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앞에 소개한 담양 용흥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와 궁궐에서의 일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공식적인 자료에서는 최숙빈의 실명을 확인할 수 없지만, 그녀의 이름은 동이가 이닌 복순 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

인현왕후는 서인계열이었고 장희빈은 남인계열이었다. 그러다보니 숙빈 최씨 또한 당연히 서인계열이 되었다. 서인은 경신환국(허적 유악사건으로 남인이 몰락하는 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파 노론과 온건파 소론으로 갈라졌다. 노론은 숙빈 최씨가 낳은 연잉군(영조)을 강력 지지했다. 영조가 즉위하는데 노론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영조는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장수한 왕으로 재위기간이 52년이나 되었다. 1699년(숙종 25년) 영조는 연잉군(延㭁君)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寧嬪)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다.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 계승문제가 표면화 되었을 때, 이복형인 왕세자(경종)를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영조는 즉위 할 때부터 엄청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모친인 숙빈(淑嬪) 최씨의 천한 신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왕인 경종의 독살에 개입되었다는 중론이었다.

이 두 가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조는 외증조, 외고조까지 추증(追贈:죽은 사람에게 벼슬을 줌)함으로써 외가(外家)의 위상을 높여 신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아버지 숙종이 금수저로 태어났다면, 아들 영조는 흙수저로 태어나 공부도 정치도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마음가짐이 대단하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