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이몽학의 난 3편

■ 이몽학의 난 3편

■ 이몽학의 난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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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본관은 전주로 본래 왕실의 서얼 출신으로 서울에서 살았으나,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를 전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현의 부하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반란 계획을 꾸민 다음, 의병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동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으로 불리는 반란을 일으켜 한때는 홍산·청양·대흥 등을 차례로 함락시켜 홍주(지금의 홍성)까지 돌입했으나, 반란군 중에서 관군에 붙은 자가 많아져서 전세가 점점 불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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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안 이몽학은 11일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덕산(德山)을 향해 달아나게 되는데,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때를 이용해 관군은 반란군 진영에 무사를 보내어 혼란시키면서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회유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중에서 앞다투어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다. 이때 한현은 반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홍가신의 진군으로 패주하다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은 33명이며, 외방에서 처형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연좌율(緣坐律)을 적용하게 되면 그 수가 너무 많아짐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해 희생자를 가급적 줄였다. 이리하여 반란 주모자의 처리는 일단락되었으나, 반란자들의 입에서 나온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최담령(崔聃齡)·홍계남(洪季男)·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 등이 붙잡혀 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杖殺)당하거나 옥사하였다. 김덕령은 뒤에 신원되었으나 반란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난의 처리가 끝난 뒤에도 더욱 늘어났다. 난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되었다.

그렇다면 이몽학은 왜 전쟁의 와중에 국가에 저항하는 난을 일으킨 것일까?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백성들이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왜 국가를 향해 칼 끝을 겨누었을까? 그것은 전쟁 중 상황에서 일본군이 아닌 조선의 의병들에게 먼저 칼날을 겨눈 것은 선조와 조선 조정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의병들에게 한 일들을 보면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는 의병활동을 이렇게 평가절하 했다.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다. 조선의 장수나 의병들은 명 장수 뒤를 쫒아 뒷처리나 했을 뿐이다. 오로지 임진왜란이란 국난극복을 한 것은 명나라 덕분이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