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5일 금요일

허난설헌 3편

■ 허난설헌 3편

■ 허난설헌 3편

강원도 강릉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 덕에 어린 시절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게 교육도 받았고,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오빠의 도움으로 문학수업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녀도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태어났기에 나이가 차자 어쩔 수 없이 한 남성에게 시집을 가서 남편을 받들며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그녀는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15세에 안동 김씨 집안의 남편을 맞이했다. 그런데 남편 김성립은 과거 공부를 했지만 별로 진전도 없었고 더욱이 아내와 시를 주고받을 수준도 안 되어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서로 사랑하지도 않았다. 아내에 대한 열등감이 쌓여 걸핏하면 기생방에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고, 술에 곤드레가 되어 새벽에 돌아오곤 했다. 그녀의 시 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 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별 볼일 없는 종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이에 그녀는 달을 보며 신세를 한탄하거나 이불을 둘러쓰고 가슴을 태우거나 혼자 시를 읊으며 한을 노래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시로 《규원(閨怨)》이 있다. ‘규방의 원망’이라는 뜻이다.

비단 띠 깁 저고리 적신 눈물 자국

여린 방초 임 그리운 한 이외다.

거문고 뜯어 한 가락 풀고 나니

배꽃도 비 맞아 문에 떨어집니다.

달빛 비친 다락에 가을 깊은데 울안은 비고

서리 쌓인 갈밭에 기러기 내려앉네.

거문고 한 곡조 임 보이지 않고

연꽃만 들못 위에 떨어지네.

지아비의 버림을 받고 규방에서 눈물로 지새우는 나날, 버려져 있는 자신의 처지를 시로 풀었던 것이다. 그런 나날 속에서도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다. 남편에 대한 애정을 자식들에게 옮겨 정성을 쏟았고 어린 남매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큰 불행을 맞이했다. 두 자식이 채 봉오리를 맺기도 전에 연이어 죽은 것이다. 그녀는 슬픈 마음을 시에 담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쓴 시가 《곡자(哭子)》이다.

『지난해엔 귀여운 딸을 잃었더니

이번 해엔 사랑하는 아들마저 잃었네.

가슴 메어지도다. 광릉의 흙이여

작은 무덤을 나란히 마주 세웠네.

응당 언니 아우의 혼들이 알아

밤마다 서로 손잡고 놀아라.』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