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독립운동가 4편
■ 여성독립운동가 4편
"남(南)에는 유관순, 북(北)에는 동풍신"이라며 두 열사를 찬양하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1919년 3월 14일 오전 11시, 함경북도 명천군 하기면 화대동에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새 5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화대 장터에 모였다가 헌병들이 모여 있는 부대인 화대헌병분견소 앞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들이 나와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댔다. 헌병분견소 앞에 모인 사람들 중 5명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박승룡, 김성련 등 몇몇 인물들은 이튿날 일본 헌병들의 만행에 항의하는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1919년 3월 15일, 이들이 이끄는 군중 5000여 명이 화대 장터에 모여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들 중에는 병으로 오래 자리에 누워 있던 동민수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는 일제의 만행에 동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만세 운동 중 일본 기마 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동민수의 둘째 딸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동풍신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뿌리치고 일어나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동풍신의 의연함에 크게 감동한 군중은 힘을 모아 만세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동풍신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 그 후 함흥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동풍신은 "내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것은 만세를 부르다 총에 맞아 숨진 아버지를 대신해서이다"라고 당당히 주장했다고 한다. 동풍신은 함흥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 형을 받은 뒤 경성법원에서 2심을 받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일제의 고문을 받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21년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하게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상황 등이 유관순 열사와 무척 닮아있어 ‘제2의 유관순’이라 불리웠다.
이들 외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남자들 못지않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제에 맞서서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