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9일 화요일

간신 김자점 4편

■ 간신 김자점 4편

■ 간신 김자점 4편

김자점은 1645년(인조 23년)에는 청나라에서 오랫동안 인질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인조가 세자빈 강씨에게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자 앞장서서 그녀의 사사(賜死)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친청파(親淸派)인 김자점이 대표적인 친청파 강빈의 사사(賜死)를 앞장서 주장한 것은 이치에 좀 맞지 않다.

추측컨대 김자점은 친청파였지만 늘 자기가 모시는 인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입장을 맞춤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이 모습에서 김자점이 간신의 전형적인 모양새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사건으로 최명길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김자점은 좌의정에 임명되고 낙흥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후 김자점은 청나라의 역관 정명수, 이형장 등과 결탁하여 친청 세력을 형성하고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나아가 김자점은 현재의 권세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욕심을 부리게 된다. 간신들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김자점은 손자 김세룡을 인조와 소용 조씨 소생인 효명옹주와 혼인시켜 왕실의 왕위쟁탈전까지 끼어 들었다.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즉위하면서 김자점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정책을 반대하다가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1650년(효종 2년)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당하고 강원도 홍천에 유배당했다.

권력의 중추에서 갑작스레 나락으로 떨어진 김자점은 효종에게 앙심을 품는다.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을 통해 조선 조정의 북벌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한다.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송시열의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이에 분개한 청나라가 국경에 대군을 배치한 다음 조선에 사신을 보내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하지만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가 사신을 달래 돌려보냄으로써 조선은 또 한 차례의 호란 위기를 넘겼다.

1651년(효종 2년) 12월 진사 신호와 해원부령 이영이 김자점 일가의 역모를 효종에게 고해바쳤다. 조사 결과 김자점의 아들 김식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적(政敵)인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효종을 끌어내린 다음, 귀인 조씨의 아들 숭선군을 추대하려다 계획을 바꾸어 김자점 손자 김세룡을 옹립하려 한 음모가 낱낱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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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자점은 반정(反正)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새로 세울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에는 김자점의 역모가 너무 허술했다. 김자점 난이라고 까지 불리는 역모는 어쩌면 친청파이자 강력한 정적이었던 김자점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한 송시열 등의 친명사대주의자들이 꾸민 음모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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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과정에서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자신의 며느리이기도 한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한 사건까지 드러나고 말았다. 의금부로 압송된 김자점은 국문(鞫問)을 당한 뒤 12월 17일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김자점과 공모한 귀인 조씨는 사약을 받았고, 손부 효명옹주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아들 김련은 형문을 받던 중 옥사한다. 그의 모친과 처, 첩 등은 모두 노비로 끌려갔다. 경기도 이천군 백족산에 있던 그의 아버지 김함의 묘소와 선산 분묘도 모두 파헤쳐져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 후 역적의 가문으로 손가락질 받게 된 김자점 일가는 뿔뿔이 흩어졌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