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정비결과 이지함 4편
■ 토정비결과 이지함 4편
《어우야담》의 다음 기록은 이지함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묵한 길에 흙을 쌓아 가운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되는 흙집을 짓고 이름을 토정이라 하였다. 밤에는 집 아래서 자고 낮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거처하였다. 또 솥을 지고 다니기가 싫어 쇠로 관(鐵冠)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밥을 지어 먹고 씻어서 관으로 쓰고 다녔다. 팔도를 두루 유람하면서도 탈것을 빌리는 일이 없었다. 스스로 천한 사람의 일을 몸소 겪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노라고 여겼는데, 심지어 남에게 매 맞기를 자청해 시험해 보려 하였다.』
이지함이 민간에 친숙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야사류의 책에 그에 관한 기록이 풍부한 데서도 증명된다. 《대동기문》에는 이지함이 스스로 상업행위에 종사한 일과 거지 아이에게 옷을 벗어 준 일화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동패락송》에는 이지함이 괴상한 행동을 하다가 노인의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계집종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했다는 이야기, 음률(音律)을 아는 이인(異人)과 장도령을 만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화는 모두 이지함이 민간에서 격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응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지함은 스스로에게는 철저히 엄격했으나, 일반 사람을 접하는 데는 매우 온화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질 또한 민중들을 쉽게 만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토정비결》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널리 회자하는 것은 어려운 시대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직접 듣고, 어려움을 해결한 그의 행적이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토정비결》이 왜 많은 학자들이나 기인(奇人) 중에서 하필 이지함의 이름을 빌렸는지 그 이유가 설명된다. 이지함은 때로는 사람들의 신수와 관상을 봐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했다. 점술(占術)이나 관상비기(觀象秘記)에 능했던 그가 백성들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모습이 후대에도 각인되면서, 《토정비결》을 쓴 사람이 이지함이라고 차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지명도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내세우면 훨씬 관심이 커지는 것은 동서고금의 공통된 진리다. 16세기 그가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이후의 시대까지도 백성들에게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던 이지함의 이름을 빌림으로써, 현재까지도 새해 우리들의 삶 속에 빠지지 않는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