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반정 4편
■ 인조반정 4편
이이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한번 역모사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번 타겟은 바로 인목대비였다. 그는 궁노비들에게 과거 선조가 쓰려져 누워 있었을 때, 인목대비가 죽은 의인왕후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를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었다.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의 폐출과 그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처형을 요구했다. 물론 조작이었지만 결국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에게 모두 사약이 내려졌다. 한편, 할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공격 받던 상황에서 영창대군 역시 무사할 수는 없었다.
1613년 5월부터 7월까지 영창대군을 처벌하라는 상소만 149회나 올라왔다. 광해군은 이를 거부했지만, 결국 7월 24일 영창대군을 유배 보내라고 지시하게 된다. 이를 보면, 광해군은 분명 영창대군이 자신의 왕위 정통성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614년 2월 10일 당시 10살이었던 영창대군은 유배지에서 끔찍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1618년 계모이자 영창대군의 친엄마인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조정 내의 서인과 남인들도 모조리 귀양 보냈다. 이렇게 광해군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통해 친형과 동생을 죽이고, 계모까지 내쫓으면서 스스로 확실한 반정(反正)의 구실을 만들어주게 되었다.
광해군의 이러한 행보는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장본인 능양군의 집안에도 피바람를 불러왔다. 능양군에게는 동생 능창군이 있었는데, 능창군은 어렸을 때부터 총기가 있고 무예(武藝)가 남달라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어느 날, 능창군의 양외삼촌인 신경희가 능창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으면서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광해군에게 불려가 직접 문초를 당하고 온갖 수모를 겪다가 유배지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없애려고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능양군(인조)는 당시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고, 능창군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 정원군도 결국 화병을 얻어 얼마 안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능양군(인조)이 살아남은 것을 보면 당시 능양군(인조)은 실록에 나온 대로 조용한 성품에 존재감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능양군(인조)을 왕 재목감으로도 보지 않았고, 위혀협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용한 성품이 가슴에 칼을 품으면 더 무서운 법이다. 순식간에 동생과 아버지를 모두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능양군은 이를 계기로 광해군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가슴에 쌓이게 되었고, 때를 기다리며 반역을 결심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숙부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고 가슴 깊숙이 칼을 갈았다.
능양군(인조)은 당시 비주류였던 서인유생들과 함께 반정을 계획한다. 먼저 신경진, 구굉, 구인후 등과 의기투합하고, 나중에 김류, 이귀와 그의 두 아들인 이시백, 이시방 그리고 최명길, 장유, 심기원과 김자점 등이 여기에 동참했다. 이들은 대부분 광해군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