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장은 난장판 5편
■ 시험장은 난장판 5편
초정 박제가(1750~1805) 역시 ‘과거난장판’이 된 세태를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마당이 뒤죽박죽 되고…심한 경우에는 망치로 막대기로 상대를 때리고 찌르고 싸우며…문에서 횡액을 당하고…심지어는 남을 죽이거나 압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북학의》
조직적인 입시비리 때문에 이미 치른 과거 자체가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1699년(숙종 25년)의 기묘과옥과 1712년(숙종 38년)의 임진과옥이다. 기묘과옥은 1699년 실시된 과거에서 34명이 합격했지만 과거 자체를 취소한 사건이다. 즉 과거 시험의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 중에 등록관과 봉미관 등이 있었다. 등록관은 과거 때 필적 부정을 막으려고 응시자의 답안을 베껴 채점관에게 넘기는 실무관이고, 봉미관은 응시자들의 답안지 서명란에 봉인을 붙이거나 떼는 일을 담당한 관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청탁을 받고 다른 응시자의 봉투를 붙였거나, 답안을 베껴 제출할 때 고쳐 써주거나 해서 부정 합격시킨 사례가 줄줄이 나왔다. 결국 관련자 수십 명이 유배되고, 시험자체가 무효 처리됐다.
13년 뒤에 일어난 임진과옥은 시험관이 친구의 아들과 지인에게 문제를 3건이나 알려주는가 하면, 시험기간이 지난 뒤 답지를 제출하도록 해서 부정 합격시킨 것이 적발됐다. 특히 시험관이 시험 전에 응시생의 집을 두루 찾아다녔던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전원의 합격이 취소되고 관련자 중 3명은 끝내 처형당했다.
이와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한 조치가 여러 차례 마련됐다. 이 같은 부정행위를 막으려고 영조는 수권관(收券官:시험지를 거두는 관리)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답안지를 내지 못하게 하기도 했고, 정조는 시험문제가 발표된 뒤 3시간 이후에 답안지를 제출케도 했다. 한편 처벌의 규정을 더욱 강화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부정행위는 쉽게 사라지지가 않았다. 이런 부정행위는 대체로 첫째 대가를 받고 행해지는 경우, 둘째 권세가에 빌붙어 한 자리를 노리려는 경우, 셋째 인정에 못 이겨 동조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째의 경우는 모든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둘째의 경우는 문벌정치가 극성을 부렸던 19세기 이후에 주로 자행되었고, 셋째의 경우는 아주 드물게 나타났다.
1894년에 단행한 갑오개혁에서 성균관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개편하며 과거제는 폐지되었다. 근대적인 관리등용법을 제정하여 종래의 신분구별도 없어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1886년 최초의 근대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園)을 설립하여 신식교육을 실시하고, 1895년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를 발표하여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의학교 등을 세워 관립학교 제도를 확립하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