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목요일

양성인兩性人 사방지 5편

■ 양성인兩性人 사방지 5편

■ 양성인(兩性人) 사방지 5편

그로부터 3년 뒤인 1465년(세조11년) 6월11일 이순지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을 거듭나게 한 과학자에 대한 예의였을까. 대신들은 사방지와 이씨의 관계를 2년 동안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았다. 때문에 두 사람은 정답게 부부 같은 생활을 지속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비와 양반가 여성의 애정행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467년(세조13년) 4월5일 조정에서 다시 사방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한명회를 비롯한 여러 신료들이 두 사람의 추문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세조에게 처벌을 권유했던 것이다.

“전에도 국문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거론하면 법이 가볍다 하지 않겠는가. 그냥 둘이 살게 내버려 두어라.” 세조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신숙주와 심회가 나섰다. “사방지는 일찍이 비구니와 간음해서 환속시킨 바도 있습니다. 그 자를 내버려두면 도성 안에 풍속이 더럽혀질까 두렵습니다.”

그들의 공세에 지친 세조는 입시하고 있던 형조 판서 서거정에게 물었다.

“이 사실을 경도 아는가?”

“물론입니다. 무릇 하늘에 달려 있는 도리를 음양이라 하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데 이 사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니 죽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일찍이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해동(海東)의 기재’라는 찬탄을 받은 바 있는 서거정의 단호한 판결에 승복한 세조는 결국 사방지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람이 아니니 뭇 노비들과 함께 어울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으로 판단을 내렸다. 이씨의 아버지 이순지가 세상을 떠난 마당에 그들을 지켜줄 보호막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왕은 이씨의 사돈 정인지나 사방지의 주인 안맹담의 집안과는 상관없는, 사방지 개인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처리해 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씨에 대한 처벌은 한 마디도 논의되지 않았다. 그녀를 치죄하면 다시금 골치 아픈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어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튿날인 4월 6일 사방지는 체포되어 곤장을 맞은 뒤 도성에서 쫓겨나 신창현(新昌縣)의 관노가 되었다.

1473년(성종 4년) 11월 8일 성종이 김유악(이씨의 아들)을 경상도 도사로 임명하려 하자 대사헌 서거정이 가문의 추문을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다.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아예 부마를 선택함에 있어 김유악의 후손은 제외되었다. 양성인 노비 사방지와 반가의 여인 이씨의 지독한 사랑은 후손들에게도 그 여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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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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