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과 과거제도 5편
■ 교육과 과거제도 5편
고려는 귀족의 신분적 특권(음서, 공음전 등)을 보다 중시하는 귀족제 사회이고, 조선은 과거와 관직을 중심으로 능력(음서의 범위 축소, 합리적인 인사 행정)을 보다 중시하는 관료제 사회이다. 그러므로 관직에 진출하여 관료로 출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따라서 과거제도는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매우 중시되었다. 과거라는 시험제도는 그야말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제도이므로, 조선은 개인의 학문적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사회는 합리적 인사 행정으로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방지할 목적으로 출신 지역이나 친·인척이 있는 곳을 피하여 관리를 임명하는 상피제를 마련하였고, 인사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5품 이하 관리 임명 대상을 심사하는 서경제를 두기도 하였다. 관리들은 임기제로 운영되었는데, 고관들이 하급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좌천의 자료로 삼아 업무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특별 채용도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들었거나 재주가 다소 부족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취재(取才)와 기존의 관리를 대상으로 덕망 있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을 선발하는 천거(薦擧), 그리고 고려보다 대상을 대폭 축소하여 2품 이상의 관리의 자제는 시험을 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가 있었다. 조선의 음서는 고려와 달리 고관으로의 승진이 어려워졌다. 추천에 의하여 인재를 등용하던 현량과는 중종 때 조광조에 의해 실시되었는데, 주로 사림이 등용되는데 이용되었다.
장원 급제한 사람에게는 왕이 합격증과 어사화를 내려주었는데, 이것은 곧 가문의 영광이었다. 장원 급제자는 ‘3일 유가(遊街)’라 하여 3일 동안 풍악을 울리며 축하 행진을 벌였다. 과거 급제자의 유가(遊街) 행렬은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볼거리 중 하나였다. 악사와 재주부리는 광대를 앞세우고 급제자는 앵삼(鶯衫) 차림에 어사화가 꽂힌 복두(幞頭)를 쓰고 말에 올라 사흘 동안 마을을 돌았다. 유가행렬이 있을 때는 동네 여자들까지 담 너머로 목을 내밀고 급제자의 모습을 구경할 만큼, 당시의 사람들은 즐거운 구경거리로 생각했다.
과거급제에 대한 기대는 한 가정의 꿈이자 대대손손 이어지는 온 집안의 꿈이기도 했다. 십대 중반이 지나면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과거 시험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집을 떠나 동년배들과 절에 올라가 경서와 문장을 집중적으로 연마하였다. 때로는 고을이나 동네에서 과거 준비를 위한 집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곧 결혼을 하고 집안일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조용히 공부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다. 시험 준비에 보다 집중하는 기간은 20~30대의 일이었고, 나이가 들면서 일상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시험 준비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사오십대에 이른 유생들은 특별히 시험 준비를 하기 보다는 이삼십년 동안 쌓아 온 독서와 경륜을 바탕으로 그 때 그 때의 시험에 응시하곤 했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