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환국換局 5편
■ 숙종과 환국(換局) 5편
신진사류들은 자신들의 구심점으로 박세채를 떠받들었고, 박세채는 일약 신진사류들의 영수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들을 소론(小論)이라 하고 송시열을 따르는 이들을 노론(老論)이라 불렀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가 된 것이다. 선조 때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파당(派黨)이 형성되었다가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파했다.
남인은 다시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하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한 것이다.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는 자신과 송시열에 반대한 박세채를 겨냥해 세찬 공격을 하던 중 51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이른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격변하는 정세에 그의 방자함이 그를 어떤 불행에 빠트렸을지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 시대가 열렸지만, 숙종이 왕통을 계승할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숙종의 정비(正妃)인 인경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숙종은 1681년 15세의 신부 인현왕후(1667~1701년)를 계비(繼妃)로 맞이했다. 그러나 인현왕후에게도 5년이 넘도록 후사(後嗣)가 없었다.
이때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에 들어온 그 유명한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오촌 숙부 역관 장현과 정권에서 밀려났던 남인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마침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1688년 그토록 원했던 왕자(후의 경종)를 낳음으로써 일약 왕비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숙종으로서는 왕이 된 지 14년 만에 보는 첫아들이었다. 기쁨에 넘친 숙종은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하고 그 이름을 정할 것을 지시했다.
정국(政局)의 실세였던 서인은 중전인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어린 점을 들어 원자 이름을 정하는 것이 신중하지 못한 처사임을 지적하고, 아직 22세밖에 되지 않은 중전(인현왕후)의 왕자 생산을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요청했다. 더구나 중전은 서인의 실세 민유중의 딸이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이 워낙 강경하게 나오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고령의 몸으로 거듭 상소문을 올려 원자(元子) 정호(定號)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섰지만, 그의 상소는 오히려 숙종을 자극했다. 서인이 정국에 포진해 있는 이상 왕권 강화를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숙종은 서인을 물리치고 남인을 재등용했다. 이것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
조정은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남인 차지가 되고 100여명 이상의 서인이 쫓겨났다. 기사환국은 인조 때부터 조선 후기 사상(思想)과 정치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송시열의 죽음을 가져왔다. 원자(元子) 정호(定號)를 반대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다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된 송시열은 마침내 왕명을 받아 서울로 오던 중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숨을 거뒀다. 인조 대부터 4대에 걸쳐 신권의 상징이었던 인물 송시열이었지만 숙종을 당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