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6편
■광해 6편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출범했지만 광해군은 즉위 직후 바로 정통성 시비에 휘말린다. 광해군은 즉위한 다음 날 이호민을 명나라에 파견해 선조의 죽음과 광해군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명나라에서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도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이유를 캐물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보름 만에 임해군이 역모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에 유배 보낼 정도로 정치적인 견제를 하고 있던 차에 명나라까지 왕통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다. 결국 광해군은 1609년 4월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돼 있던 임해군을 처형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광해군이 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였다는 설과 이이첨이 사람을 보내 임해군을 살해했다는 설이 있다. 결과적으로 임해군은 동생 광해군이 왕위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임에는 분명하다.
임해군보다 광해군을 힘들게 한 인물은 동생 영창대군이었다. 영창대군의 최대 후원자였던 유영경은 선조 사후 한 달이 못 돼 처형됐고, 광해군 초반 각종 역모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소북 세력은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했지만 살아 있는 적통의 존재는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1613년 4월 25일 조령(鳥嶺: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은 장사꾼) 살해사건이 일어났다. 살해의 주범은 서인(西人)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 심우영, 박치인, 박치의, 이경준, 허홍인 등 7명의 서얼들로 밝혀졌다. 이들은 여주, 춘천 등지에 모여 ‘강변칠우(江邊七友)’로 자청하면서 무기와 양식을 준비했다. 서얼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은상을 살해한 것이었다. 그런데 심문 도중 대북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박응서가 놀라운 진술을 했다.
“자금을 확보해 김제남(영창대군의 외조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광해군의 아들)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확산됐고 정국은 초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결국 김제남이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되어 강화도로 유배됐다. 1614년 봄 역시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은 영창대군을 작은 골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증살(蒸殺: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임)시켰다. 영창대군은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가장 충격을 받은 인물은 생모 인목대비였다.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에게 광해는 아들이 아니라 원수였다. 결국 광해는 어머니 인목대비를 1615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가게 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으며, 3년 후 ‘서궁(西宮)’으로 명칭을 격하시켰다. 선조가 그렇게 예뻐하던 정명공주도 평민으로 강등 시켜 이 불쌍한 모녀는 가택연금 수준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게 됐다. 광해군은 교서를 반포해 흉측한 글을 유포시킨 인목대비의 죄상을 알리고 이에 연루된 나인들을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인목대비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이러했으니, 서궁에서의 비참한 생활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현재 덕수궁 안에 ‘석어당(昔御堂)’ 이라는 건물이 이 두 모녀가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