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란胡亂 6편
■ 호란(胡亂) 6편
영화 ‘남한산성’에도 나오듯이 남한산성은 원래 왕의 피난지가 아니었기에 충분한 식량과 의복 등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는 군사 1만5천명과 관원 300명, 그리고 약 50일치의 군량이 있었다. 1636년 12월 15일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에서 청의 13만 대군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빙 둘러 사람 키 두 배 쯤 되는 높이의 나무를 쌓아올려 외성을 만들었다.
외성 밖에는 나무 울타리를 쳐놓고 쇠방울을 달아 남한산성은 졸지에 감옥이 되어버렸다. 1637년 1월1일 후속 부대로 도착한 청태종(淸太宗)은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포위망을 구축하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조선군 지휘부는 조선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간혹 군사를 내보내 청군을 기습하곤 했으나 대세에는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청군들은 경기 지역 전체를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했다. 젊은 여자들은 모조리 청군의 군막으로 끌려가 노리개가 되었다. 엄마가 끌려가고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은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청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은 시일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기대하던 전국의 근왕병들도 오지 않았다.
이런 판국에도 대신들은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로 나뉘어 싸우기에 여념 없었다. 김상헌(金尙憲)과 삼학사(홍익한·윤집·오달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청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 했고, 최명길(崔鳴吉)은 화의를 적극 주장했다. 주전파(=척화파)들은 사실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문신들이었다. 얼마나 현실감이 떨어지는 주장인가?
남한산성 안에는 1만4000여명이 약 50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조선과 청군 사이에는 여러 차례 협상이 오고 갔다. 주화파(主和派)가 항복조건을 가지고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동안, 경상도 군사 4만이 광주의 쌍고개에 이르러 진지를 구축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조선 최대의 병력이 집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청군에게 포위당한 경상도군 4만은 청군의 공격에 궤멸되었고, 경상우병사 민영이 전사하자 근왕군은 남한산성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조선군 전체 병력은 청군에 비하여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총력을 집결했으면 20만 명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인 인조(仁祖)는 애초부터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도망칠 궁리부터 했고, 게다가 총사령관인 도원수 김자점은 전쟁에 대하여 제대로 된 전략 하나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바람에 조선군은 지리멸렬(支離㓕裂)해져 적을 앞에 두고도 총력을 집결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병사들 중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던 근왕병들은 청군에게 차례차례 격파되었다. 조선 조정은 백성들이 죽든지 말든지 남한산성에 갇힌 상태에서도 주전(主戰)파와 주화(主和)파로 갈라져 격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