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9일 토요일

홍의장군 곽재우 7편

■ 홍의장군 곽재우 7편

■ 홍의장군 곽재우 7편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그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고 상경을 재촉했다. 그때 곽재우의 삶은 청빈함을 넘어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교지를 갖고 찾아갔던 금군(禁軍)은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아주 초라했고, 병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했다”고 보고했다. 곽재우의 아들은 아버지가 상경하려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타고 갈 말과 종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벌옷도 다 해져 날씨가 추우면 길을 떠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국왕은 즉시 의복을 지급하라고 하명했다(1608년(광해군 원년) 9월 14일).

1610년(광해군 2년) 곽재우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ㆍ한성부 좌윤(종2품)으로 임명되어 잠깐 상경했지만, 역관(譯官)과 원접사(遠接使)가 왕명을 무시했다고 비판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낙향했다. 그 뒤 별세할 때까지 곽재우는 계속 망우정에 머물렀다. 빈곤한 경제사정은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협하지 않는 곽재우의 직선적인 성품은 별세하기 전에 한 번 더 표출되었다. 그때 조정의 가장 큰 논란이었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사사하는 문제와 관련해 곽재우는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1613년:광해군 5년). 이 때문에 그는 대북(大北)의 탄핵을 받아 사사될 뻔했지만, 장령 배대유(裵大維)의 변호로 목숨은 구했다.

낙향한 곽재우는 현풍 비슬산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도인처럼 살다가 1617년(광해 9년)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1617년 3월 병이 깊어지자 그는 “생사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라면서 치료를 중단했고, 4월 10일 망우정에서 별세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 뒤 지금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안장되었고, 그를 모신 사우(祠宇)에는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현판이 내려졌으며,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훗날 충익(忠翼)이란 시호를 받았다. 전쟁에서 스스로 떨쳐 일어나 적을 물리쳤으나 살아생전에 공을 마다한 곽재우에게는 그것도 다 헛된 이름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활약이 컸다. 관군들이 개전 후 한 달이 안 되어 한양을 내 주는 등 일본군에게 맥없이 당할 때 곽재우와 같은 사람들이 가족과 고향,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정 하나로 일어난 것이다. 패해서 도망치기 바쁜 관군을 대신해 지방의 사림들을 중심으로 의병의 뜻을 모으고, 각 지역의 농민과 양민, 노비들을 모아 거병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빈곤한 삶 속에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모순에 답답함을 느낌과 동시에 안타깝고 착잡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