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사도세자 8편
■ 영조와 사도세자 8편
아버지 영조는 세자가 왕이 되면 연산군 같은 폭군이 될 것 같은 불안감에 1762년(영조 38년) 5월 13일, 영조는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세자를 불러 휘령전(徽寧殿)으로 나선 후, 문을 4-5겹으로 막고 총관 등으로 하여금 궁의 담쪽으로 칼을 뽑아들게 하고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세자는 관을 벗고 맨발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라.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노라!”
세손이 알고 뛰어와 울며 용서를 구했지만, 그 외 입시한 3정승, 승지 등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자진하라는 영조의 서슬 퍼런 명에 세자는 울며 애원했으나 영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음을 깨달은 세자가 자결하려 하자 신하들이 이를 막았고, 결국 왕은 뒤주를 내오게 하고 그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물과 음식조차 주지 못하도록 했다. 세자는 그 뒤주 안에서 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갇힌 지 8일째 되던 날 2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 모습을 세자의 아들 세손(世孫)이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죽어가는 장면이 실제로 연출된 것이다. 다만, 실록에는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自內嚴囚).”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뒤주에 8일을 가두어 죽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통론은 세자가 뒤주에서 8일을 보낸 후 죽었다는 것이다.
왜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을까? 왜 그것도 뒤주에 가두어 죽였을까? 사도세자의 죽음을 가장 자세히 해명한 자료는 혜경궁이 쓴 《한중록》이다.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룬 부분은 순조 때 쓴 것이다. 임금의 할머니가 썼기에 다른 사람은 감히 쓸 수 없는 말을 담을 수 있었다. 그래도 사도세자의 사인과 직접 연관된 세자의 죄에 대해서만은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중록》을 사실로 굳게 믿어 사도세자는 미쳐서 죽었다고 말한 혜경궁 홍씨의 기록을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쳤다고 해서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수 있을까. 이러한 의혹 끝에 새로운 설이 사인으로 제기되었다. 정조가 쓴 《사도세자의 행장》을 주자료로 삼아 사도세자가 당쟁의 와중에 희생되었다는 그럴 듯한 설(說)이 만들어졌다. 사도세자가 집권층인 노론을 미워하고 소론 편을 들다가 노론의 이간질로 영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친정이 노론인 혜경궁이 남편을 죽인 데 자기 집안이 앞장선 것을 변명하기 위해서 세자를 미치광이로 몰았다는 것이다. 미쳐서 죽었다는 것보다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그럴 듯한 새 가설이 또 하나의 통설이 되었다. 각자의 위치와 입장에 따라 다른 기록과 해석을 함으로써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오랫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사도세자에 대한 내용을 대체로 정설(正說)로 알고 있다.
- 9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