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3일 토요일

할고봉군割股奉君 - 허벅지살을 베어 군주를 모시다. 

할고봉군割股奉君 - 허벅지살을 베어 군주를 모시다. 

할고봉군(割股奉君) - 허벅지살을 베어 군주를 모시다.\xa0

벨 할(刂/10) 넓적다리 고(肉/4) 받들 봉(大/5) 임금 군(口/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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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를 나타내는 股(고)는 무릎과 엉덩이를 연결하여 몸의 힘을 쓰게 하는 중요한 근육이다. 글자가 포함되는 성어도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를 이르는 股肱之臣(고굉지신), 허벅지살을 베어 병든 부모를 낫게 한 효자 割股療親(할고료친) 등 비장미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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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적다리 살을 베어(割股) 군주를 살린(奉君) 이야기가 더 있으니 중국 春秋時代(춘추시대) 晉(진)나라의 은사 介子推(개자추)의 일화에서 비롯됐다. 개자추는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란 속담에서 寒食(한식)을 있게 한 사람이다.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로 4월 5일이나 6일쯤이 되는데 淸明(청명)과 하루 사이이므로 큰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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介之推(개지추)로도 불리는 개자추는 후일 春秋五覇(춘추오패)가 되는 晉(진)나라 文公(문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년 동안이나 주변국으로 전전할 때 충성을 다하여 모셨다. 불운한 공자 重耳(중이)는 부친 獻公(헌공)이 주변국을 정벌했을 때 군주의 미인 딸 驪姬(여희, 驪는 나귀 려)를 데려와 첩으로 삼는 바람에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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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희가 자신의 소생 奚齊(해제)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태자를 모살하고 다른 공자도 해치려 한 것이다. 43세였던 중이는 개자추와 중신 狐偃(호언), 趙衰(조최, 쇠할 衰는 상복 최) 등과 함께 이웃나라를 떠돌며 온갖 고생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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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이웃 국경을 넘을 때 양식이 떨어져 아사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개자추가 고깃국 한 그릇을 중이에게 바쳤다. 어디서 가져왔느냐고 물으니 ‘신의 허벅지살(臣之股肉也/ 신지고육야)’이라며 ‘충신은 몸을 바쳐 주군을 섬깁니다(忠臣殺身以事其君/ 충신살신이사기군)’는 말을 실천할 뿐이라 아뢰었다. 눈물을 흘리며 감동한 중이는 꼭 보답하겠다고 했으나 秦(진)의 도움으로 뒤늦게 문공이 되고 논공행상할 때 깜빡 개자추를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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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한 개자추는 모친과 함께 산에 숨어버렸고 뒤늦게 안 문공이 나오도록 불을 질렀으나 끝내 불에 타 죽었다. 이후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죽은 날엔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만 먹게 됐다고 한다. 여러 사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東周列國志(동주열국지)’에는 割股啖君(할고담군, 啖은 씹을 담)으로 재미있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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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자추는 하늘이 정한 것을 탐내어 자신의 공로를 삼아서 될 일이 아니라며 貪天之功(탐천지공)이란 말도 남겼다. 자신이 공이 있다고 스스로 나서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莊子(장자)는 절개와 신의의 대명사 伯夷叔弟(백이숙제)와 尾生(미생)과 함께 개자추를 이름에 사로잡혀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고 낮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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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는데 생명까지 걸지는 않더라도 믿음을 걸핏하면 저버리고, 동네방네 떠벌린 약속을 헌신짝같이 팽개치는 오늘날의 지도자를 보면 그래도 이들이 그립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